ADVERTISEMENT

전국 주부백일장 장원 작품|어머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엄마 이게 내 방이야?』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아이는 믿기지 않는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책은 책꽂이에 꽂고 장난감은 이렇게 종류대로 바구니에 담고 이제는 옷도 혼자 찾아입을수 있어야 돼요.』
우리는 소꿉동무처럼 다정하게 살림을 차리며 즐거워 했다.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네방이 있어야지 이곳에서 동화속의 주인공도 만나고, 로보트가 되어서 우주로 뗘나보기도 하렴.』밤 늦도록 제방에서 놀다가 토끼베개를 꼭 껴안고 자는 아이의 장미빛볼에 임맞춤을 해주며 나는 속삭였다.
남편은 안방에서 이미 피곤을 곁에 놓고 잠에 빠져있었고 나는 작은 만족감으로 또 하나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작긴 하지만 새로 이사온 아파트엔 방이 세개나 되었다. 마루도 없는 단칸방에서 살림도구와 책과 장난감과 기저귀가 뒤엉켜 있던 신혼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널찍하고 풍요로운 공간인가.
그러나 그 방은 이것저것 잡동사니로 가득하여 제 모습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며 물러 나오다 낡은 상자를 비집고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빛바랜 수첩을 보았다. 그것은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소중한 유품이었다. 나는 수첩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아, 어머니 여기 계셨었군요. 제가 너무 정신이 없었나봐요.』 무엇인지 모르게 숨가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이 한순간 정지된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아늑하고 좋은 방이 있는데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군요.』나는 방문에 기대어 오래도록 그 방에 머물러있었다.
일곱 남매, 아홉식구인 우리집은 방이 세 개뿐. 아버지와 아들·딸들이 각각 차지하고 나면 어머니 혼자만의 공간은 부엌일 수 밖에 없었다. 부뚜막에 올라앉아 희미한 알전구밑에서 비밀처럼 책장을 넘기시던 모습, 방에 목이 타서 부엌에 들어갔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본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머니의 빛나는눈, 동그란 어깨, 잔잔한 미소는 번잡한 대낮에 미처 느낄수 없었던 한편의 서정시 였다.
새끼줄로 묶은 연탄을 한장씩 사서 때야 하는 어려운 살림, 하루종일 허리를 필수없는 힘든 집안일 , 어머니의 정서를 궁상이라고 단정짓던 아버지곁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며 반란을 꾀하는 아이들을 따뜻이 감싸안으며 사랑과 믿음으로 꿋꿋이, 묵묵히 가정을 일구던 어머니의 저력은 바로 밤이면 단정히 부뚜막에 앉아 신앙처럼 책앞에 고개를 숙이시던 그 모습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엄마, 이것들 좀 치우세요.』먼지와 거미줄과 쥐똥이 범벅이된 다락에 엄마의 누런책과 일기장은 소중히 자리잡고 있었고 짜증 반, 안스러움 반으로 내뱉은 나의 말에 엄마는 꿈꾸듯 대답하셨다.
『엄마는 서재를 하나 가겼으면 좋겠구나』하고….
창문을 열면 푸른 하늘에 가슴도 열리고, 화단의 장미꽃이 기웃거리는 향기로운 방. 저녁노을에 가슴저미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밤하늘 별빛에 취해 삶의 기쁨을 노래할수 있는 그러한 방.『세월이 얼만큼 스치고 지나가야 그 꿈을 이룰수 있을까.』 엄마는 쓸쓸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알수있을것 갈다. 엄마는 가슴속에 자신의 아름다운 방을 갖고 계셨음을…
그곳에서 외로움의 창을 열고 고통을 엮어 한줄의 시로 날려보내셨을 어머니, 삶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마른꽃잎처럼 하나하나 책갈피에 간직하셨을 어머니.
나는 지금 생활의 향기없이 너절하게 널러진 방 앞에서 잠시 숙연해진다. 이 소중한 공간을 잡동사니로밖에 채워 넣을수 없는 막내딸의 메마른 감정에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까우실것인가.
어머니는 지금도 내게 말씀하시고 계실 것이다. 『딸아, 소증한 네 방을 가져라. 그곳에서 너를 성장시키고 네 가족과 이웃을 위한 사랑을 키우거라. 너만의 신비한 삶의 기쁨을 누려라』 하고….
나는 새로운 방에서 새모습으로 어머니를 만날것을 꿈꾸며 장미가 만발한 화단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운 어머니. 어머니는 내 아름다운 방의 영원한 주인이며 삶의 다정한 친구로 남아 계실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