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야의 저력…‘마지막 왕자’의 손자 김유신 삼국통일 이루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21호 22면

[이훈범의 문명기행] 무력과 월광의 엇갈린 운명 

전북 남원의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분군. 표지석만 치우면 영락없는 뒷동산 소나무숲이다. 마늘밭도 있었다. 가야의 문명과 역사가 그렇게 묻혀 신화가 되고 있다. 다행히 최근 사적으로 지정돼 긴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전북 남원의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분군. 표지석만 치우면 영락없는 뒷동산 소나무숲이다. 마늘밭도 있었다. 가야의 문명과 역사가 그렇게 묻혀 신화가 되고 있다. 다행히 최근 사적으로 지정돼 긴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마지막 왕자’란 말만큼 서글픈 느낌을 주는 말도 드물다.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라마저 잃어버렸다는 함의가 담긴 까닭이다. 신라의 마의태자, 대한제국의 영친왕이 떠오르지만, 고대왕국 가야에도 역사가 기록하는 두 명의 마지막 왕자가 있다. 전기 가야연맹을 이끌었던 금관가야(가락국)의 왕자 무력(武力)과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 대가야(가라국)의 왕자 월광태자가 그들이다.

신라에 투항 후 진골귀족으로 편입 #아들 서현 이어 유신까지 신분 상승 #대가야 월광태자는 비운의 왕자 #월광사 터 3층석탑엔 그의 한이 …

마지막 왕자인 건 같은데 두 사람의 운명은 판이하다. 월광태자는 마의태자나 영친왕처럼 ‘비운의 왕자’라 불릴 만하지만, 무력 왕자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인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또는 구해왕)이 신라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가락국 후손이 김해 김씨, 전체 인구 10%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더불어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세 아들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구형왕과 가락국의 왕족들은 신라 진골귀족으로 편입됐고 다스리던 영토를 그대로 하사받아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금관가야의 다른 나라들은 누리지 못했던 이 같은 특혜를 받은 것은 아마도 성씨가 같은 김(金)씨였기 때문일 터다. 신라는 박(朴)씨와 석(昔)씨로 왕위가 계승되다 261년 김씨 왕조로 바뀌어 이어져 왔다.

주지하다시피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합 속의 알에서 나왔다. 신라 김씨 시조인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 든 아기였다. 그런데 그 금궤를 알을 낳는 닭이 우러르고 있었으니, 신라 왕실이 가락국 왕족들을 자신들(성골)보다 하나 낮은 진골 계급으로 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가락국의 이 빛나는 후손(김해 김씨)들은 수로써 역전에 성공한다. 오늘날 김해 김씨는 50만 명이 채 안 되는 신라의 후손(경주 김씨)들의 열 배에 달하는 450만 명 가량으로,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최대 성씨집단이며 김씨 중에서도 40% 정도를 차지한다. 물론 후대에 슬쩍 끼어든 가짜들도 많다. 그래도 워낙 많다 보니 “생식기에 점이 있어야 진짜 김해 김씨”라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유력하게 떠돌던) 속설까지 있었다.

어쨌거나 가락국의 왕족들은 무력과 그의 아들 서현(舒玄), 손자 유신(庾信)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피나는 노력으로 신분 상승을 거듭해 신라 조정의 최고위직까지 오르게 된다. 특히 무력은 554년 백제와 대가야의 연합군을 관산성에서 쳐부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를 도와서다. 이 같은 공로로 진흥왕 순수비 중 ‘마운령비’에는 상대등 거칠부 다음의 높은 자리에 기록돼 있다. 최고위층 관료가 됐다는 의미다.

그의 아들 서현은 무공(武功)에 더해 ‘혼공(婚功)’까지 사용한다. 갈문왕(葛文王)의 손녀 만명(萬明)과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한 것이다. 갈문왕이란 왕의 생부나 장인 같은 근친에게 주는 존호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성골 계급의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진골 신분을 뛰어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비난할 것은 못 된다. 이들 가문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도 드물다.

특히 서현과 만명 사이에서 태어난 유신은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가 바로 당대의 명장 김유신이다. 그에 대한 일화는 넘쳐나는데 대부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645년 백제군이 쳐들어와 급히 출정하게 됐을 때 가족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50보쯤 지나쳐서야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해서 마셨다. 이어 “물맛이 예전처럼 좋구나” 하는 말만 남긴 뒤 출발했다. 이에 군사들이 “대장군이 저럴진대 어찌 우리들이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라며 당차게 진군하니 백제군이 기세에 눌러 퇴각했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 달빛 물들면 신화 돼”

경남 합천 월광사터에 남아있는 3층석탑. 월광태자의 한이 서린 듯 하다. [중앙포토]

경남 합천 월광사터에 남아있는 3층석탑. 월광태자의 한이 서린 듯 하다. [중앙포토]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그에게 백제 땅을 주겠다고 유혹하며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했을 때도 단칼에 거절했다. 672년 아들 원술이 당 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해오자, 왕에게 참수형을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그의 집안도 기울기 시작한다. 가문의 영화를 생각한다면 아들을 두둔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뒤를 봐줘야 했겠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의 명예였던 것이다.

월광태자는 태생부터 비운에 쌓여 있던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이뇌왕은 백제 무녕왕의 침공이 거세지자 신라와의 동맹을 모색한다.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기에 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보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법흥왕 9년(522) 3월>

하지만 이 혼인동맹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 이유를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한다.

“가라 왕은 신라 왕녀와 혼인해 자식을 낳았다. 신라가 왕녀를 보낼 때 아울러 1백 명의 시종을 보냈다. 이들을 각 현에 배치하고 신라 옷을 입도록 했다. 아리사등(탁순국왕으로 추정)이 이에 분개해 모두 돌려보냈다. 신라가 크게 분노해 왕녀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가라의 기부리지가(이뇌왕)가 ‘부부가 됐고 또한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이에 신라는 도가, 고파 포나모라 세 성을 함락시켰고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쳤다.”<계체천황 23년(529) 3월>

대가야가 다시 백제 쪽으로 기울면서 적대관계가 커진 신라인 어머니를 둔 태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을 것이다. 결국 대가야는 562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며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았다. 사다함은 오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단문으로 달려들어가 흰 깃발을 꽂았다. 성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어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서니 일시에 항복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23년 9월>

월광태자는 끝내 즉위하지 못하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가 지었다는 가야산 자락의 월광사 터에는 지금도 3층석탑 두 개가 동서로 마주 보고 서있다. 오랜 세월에 상륜부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뽐내곤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건 월광태자의 한이 서려있기 때문일 터다.

최근에는 월광태자가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태자가 어머니 나라 신라로 망명했다가 대가야가 정복된 뒤 가야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꼭두각시 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신라의 압력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했다는 추측이다. 월광이 마지막까지 신라에 항거하다 전사했으며, 후대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 곳에 월광사를 지었다는 야사도 있다. 가야는 없고 추측만 무성한 것이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던 이병주 선생의 탁견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