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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미 FTA와 한·일 FT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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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본협상이 시작되면서 일본 정부가 초조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는 듯하다. 최근 수년간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았음에 비춰 양국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했다. 적어도 공산품의 관세 자유화 정도는 이뤄졌을 것이다. 비관세 장벽을 둘러싼 협상도 1980년 이후 격렬한 구조협의를 거쳤기 때문에 이제는 큰 현안이 없어졌고, 고도의료기기의 상호기준인증(MRA) 등 양국 경제 일체화를 위한 협의가 이어지고 있다. 미.일 FTA 협상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두 나라가 정말 깊이 있고 포괄적인 수준의 협상을 한다면 세계무역기구(WTO)라는 국제적인 룰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 농업과 서비스 분야에서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받게 될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FTA 본협상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균형연산(CGE) 모형을 이용한 각종 예측에서도 한.미 FTA가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최대 산업인 자동차는 이미 현지 생산을 시작한 지 오래며, 현지인들을 대량 고용함으로써 현지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가격경쟁이 치열한 산업의 경우 2005년 멕시코와 경제연계협정(EPA)이라는 이름의 FTA를 발효시켰기 때문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설정해둔 상태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품목들은 한국의 수출과 직결된 자본재.중간재가 대부분으로, 한.미 간에 평균 8%의 관세 철폐가 이뤄지더라도 한국이 수입국을 미국으로 바꿀 만한 품목은 많지 않다. 한.미가 FTA 협상을 극적으로 마무리하고 대단한 성과를 올리건, 협상에 실패하건 간에 일본은 얻는 것이 많다. 전자의 경우 일본 내 자유무역 옹호 세력에 큰 힘이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도 한.미 간 협상 과정을 살피고 다양한 형태로 분석해 미국의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이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일 FTA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길 바라고 있다. FTA는 경제자유화 협상이지 협력 협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이유는 경쟁으로 인한 조정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이보다 더 많은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예측은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며,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이는 정부가 경제발전 전략에 맞는 적절한 자유화를 상대국으로부터 얻어내고, 시장경제의 중심에 있는 기업들이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과제는 첫째도, 둘째도 기업의 설비투자를 늘려 고용을 확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에서 찾고 있다는 것도 생산성에 비추어 보면 올바른 방향일 것이다. 미국과의 서비스업 관련 협상은 농업시장 개방과 다른 차원에서 전략적.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다만 금융.물류.통신을 막론하고 한국 시장은 그다지 큰 시장이 아니란 점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 기업이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허브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중국과의 시장 일체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면 중국은 안전보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미 간 서비스업 연합을 환영하고, 한.중 FTA 협상에서 기존 WTO 협상 이상의 자유화를 약속해줄까. 일본은 중국보다 훨씬 서비스 자유화가 앞서 있을뿐더러 한국과의 비자면제 협정으로 인적 교류가 자유로운 상태다. 그리고 미.일 간 고도의 서비스 협상도 가능하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테이블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고이즈미 이후의 외교를 생각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FTA 협상이 1년 반 이상 중단된 이유는 한국에서는 일본의 농업시장 개방 문제 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한국이 자국의 발전전략 속에서 한.일 시장 일체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고, 자신감을 갖고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미 FTA는 한.일 FTA를 앞두고 다시 한번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본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대목이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정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