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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 '청와대 앞의 작은 외침' - 1인 시위 현장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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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피켓이나 플랜카드, 어깨띠 등을 두르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모습은 이제 시내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나홀로 시위인 ‘1인 시위’로, ‘외교기관의 1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고, 집회는 2인 이상을 말한다’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의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1인이 시도하는 새로운 시위 문화다. 최근 스크린 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1인 시위로 더욱 잘 알려졌다. 1인 시위는 광화문, 청와대, 국회의사당, 검찰청, 국세청 등지에서 주로 행해진다. 특히 청와대는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대통령에게 호소하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시위 참가자의 말처럼 “효과적으로 시위를 하기 위해” 청와대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청와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앞 봉황분수대 주변 등에서 1인 시위가 허용되자, 청와대 앞과 효자동 입 구, 경복궁 등 청와대 주변 1인 시위가 크게 늘어났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근식 교수는 “1인 시위는 민주화가 발달되고 정치 및 표현의 자유가 보 장 되어 있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며 “문제 해결보다는 그들에게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정교수는 “정부는 1인 시위자들의 자유로운 표출을 돕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 앞에서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촉구하고 있는 스님. [사진 = 이해완]

하지만 청와대 앞에서의 1인 시위가 꼭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 최근, 평택 시위 등 집중적으로 조명 받는 집단 시위에 비해 1인 시위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1인 시위 정도가 유명 영화배우들의 참여로 많은 관심과 언론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1인 시위자 대부분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청와대를 찾는다. 지방에서 올라 온 시위자들이 많고, 대부분은 힘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하는 등의 사회적 약자이다.

산업 재해 때문에 1인 시위를 하는 이상수(53) 씨는 200여 일 동안 청와대 앞을 묵묵히 지켰지만 대통령 얼굴을 본 건 4번뿐이라고 한다. 그것도 대통령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창문을 내리고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줄 때다. 바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해도 근본적으로 소통이 안 되는 것이 한계다. 아무런 피켓도 들지 않고 봉황분수대 앞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아주머니가 대표적인 예다. 사연이 궁금해 접근하자, 양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흔들며 대화를 거부했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1인 시위를 시작한지 6년 정도 됐다고 한다. 부산에서 공사로 인해 아파트 지반이 내려앉아 소송을 제기했지만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 청와대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자 체념의 상태로 무언의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이상수 씨는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 것 같다”고 하며 안타까워했다. 이 씨는 “이렇게 1인 시위를 하는 것은 아무런 실효성도 없다”며 “청와대 앞의 시위자 모두가 똘똘 뭉쳐 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 사람도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은 결코 호전될 기미가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인터넷으로 국민들과 소통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 씨는 “컴맹이기 때문에 대통령과 소통이 힘들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청와대 앞에는 조선시대 때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주었다는 ‘신문고’가 있지만,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상징으로 존재 할 뿐이다.

▲청와대 앞에서 6년 여 동안 1인 시위를 했다는 아주머니. [사진 = 유은영]

5월 13일부터 8일 간 청와대 앞을 지켜본 결과, 파룬궁 탄압을 반대하는 사람,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승인하라는 스님 등 다양한 목소리가 청와대 앞에 울려 퍼지고 있다. 1인 시위는 의사소통이 원활한 쌍방향적인 수단이 아니라 일방향으로 흐르는 사회적 약자들의 ‘작은 외침’에 불과하다. 언론의 주목을 못 받고, 정부의 관심을 못 받으며, 국민들이 외면하고 있는 동안 1인 시위자들의 목은 타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함에도 자신의 억울한 사연이 해소될 때까지 꾸준히 청와대 앞을 지킨다는 게 1인 시위자들의 입장이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안민호 교수는 “기존 언론들은 집단 시위현장을 단순 중계하는데 그쳤지만, 이제는 관찰자로서 현장의 이면을 살피는 이성적 시각이 필요하다”며 “언론이 1인시위에 관심을 가져, 시민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고 해결방안은 무엇인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절실하다.

▲1인 시위와는 달리, 대규모 집회는 여론의 주목을 받는다. 5월 13일, 종로에서 있었던 미군 평택 이전 반대 시위. [사진 = 최중혁]

[SUB 1]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1 “전 청와대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산업재해 보상 외치는 이상수 씨

작년 10월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1인 시위를 하러 청와대로 ‘출근’한다는 이상수 씨는 4급 장애인이다. 이 씨는 97년 6월, 자신이 일하던 경남 창원시의 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 씨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근무 중 일어난 일이었기에 산업재해보상(이하 산재)을 받을 수 있었지만, 회사 측은 이 씨를 속이고 보상을 미뤘다. 이 씨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수술비 및 재활 비용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결국 자신이 평생 모아 장만했던 13평짜리 아파트와 매달 120만원 씩 붓던 적금 3천만 원을 날리고 그만 파산하기에 이른다. 이 씨는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채 지금은 생사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눈물을 머금고는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가족을 잃은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한 이 씨는 자신이 산재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 씨는 “회사와 병원, 근로복지공단에서 단합해 나를 속였다”며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보상을 피하기 위해 손을 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회사 측에 항의 했지만 회사는 2년을 더 근무해야 산재를 받을 수 있다며 병의 후유증도 가시지 않은 이 씨에게 근무를 강요했다. 그는 “회사에선 내가 골칫덩어리라 여겼던지 2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욕도 하고 갖은 고생을 다 시켰다”며 “병이 완치되기는커녕, 더 키웠다”고 말했다. 2년 후 이 씨는 근로복지공단에서 나온 장애보상금 563만원과 회사에서 준 소정의 퇴직금을 받았다.

▲수술 부위를 보여주고 있는 이 씨. [사진 = 최중혁]

퇴직 후, 이 씨는 생계가 막막했다. 몸은 계속 아파왔고 하루에 먹어야 할 약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씨는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 자신과 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서울 행 기차를 타고 청와대를 찾은 이 씨는 막막하기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학력이 전부인 그는 글을 몰라 쌈짓돈 2만원을 건네주고 대필을 부탁했다. “솔직히 나에겐 2만원은 큰 돈이다”며 “굶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만 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렇게 무려 3년 8개월 여 동안 이 씨는 호소문을 청와대에 보냈다. “가방 끈도 짧고, 돈이나 백도 없으니 이 방법 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쓸어내리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장애인 복지카드’로 보상됐다. 하지만 이 씨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에게 복지카드는 그의 진정을 막아보기 위한 정부의 입막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씨는 “복지카드로 최소한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에 불구하다”며 "억울함이 진정으로 해소 되는 그날까지 1인 시위를 계속 하겠다"고 밝혔다.

이 씨가 자신의 복지카드를 직접 꺼내며 이야기를 계속 하려던 순간, 카드에 있는 증명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증명사진의 이 씨는 지금의 왜소하고 누추한 모습과는 달리, 여느 가장의 늠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난 배운 것도 많지 않아 무조건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며 “하지만 나 같이 힘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열심히’만으론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는 매일 아침 첫 차를 타고 새벽 6시 30분까지 청와대에 도착해 오후 5시까지 1인 시위를 한다. 시위를 마치면 인천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 씨는 타인의 도움으로 남의 집 화장실 옆에 마련된 작은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그래도 "도와주는 작은 손길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며 취재 중 처음으로 미소를 띄었다.

오늘도 등산복 차림과 흰 마스크를 쓴 채 자신의 억울한 사연이 담긴 피켓을 들고 청와대로 향한다는 이 씨. 1인 시위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는 질문에 “나와 같이 억울한 사람들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계속 하겠다”며 “대통령을 만나면 법이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롭게 쓰일 수 있도록 부탁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산업재해보상과 이상수 씨에 대한 노무사의 답변

‘근로자 또는 공무원의 업무상 부상·질병·신체기능장애·사망 등에 대하여 행하여지는 보상’을 말한다. 특히 직장근무 중 발생한 ‘업무상 재해’는 말 그대로 업무와 관련이 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일산에 있는 대원 노무법인의 박천조 노무사는 “업무상 재해 중 가장 잦은 질병이 뇌출혈인데, 작업조건과 환경이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며 “아파트 경비직 같은 경우 재해 발생 시,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 “황 박사를 구출하자!” -황우석 박사의 무죄를 외치는 유성곤 씨

검은 선글라스와 덥수룩한 수염에 모자를 눌러 쓴 유성곤(44) 씨는 외모부터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자신을 ‘NT-1구국결사대’라 소개하며 뙤약볕 밑에서 청와대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유 씨가 말하는 ‘NT-1’은 다름 아닌 황우석 박사가 2004년 사이언스 지에 게재 했던 그 문제의 1번 줄기세포다. 그는 ‘황 박사님을 구출하자!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란 피켓과 함께 대통령께 보내는 호소문을 가지고 나와 청와대를 찾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유 씨는 작년 12월 28일, 서울대 앞에서 황 박사 지지 시위를 시작했다. 길어야 한 달이면 끝날 것이라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황 박사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미궁에 빠졌고, 결국 그의 시위는 오늘까지 이르렀다. 그는 “개인사업도 접고 1인 시위에만 몰두하고 있다”며 “한 나라의 가장인 대통령께서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몸이 힘들지만 청와대를 계속 찾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황 박사의 불구속 입건에 대해 “황 박사 문제와 관련해 많은 사실들이 조작됐다”며 “원뿌리가 거짓인데 가지조차 거짓이지 않겠냐”며 황 박사를 옹호했다. 유 씨는 “이번 사건은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비판했다. “언론이 사건을 키웠고,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주범”이라는 것이다. 또, “이번 사건은 수많은 기관과 인물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어,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예측했다.

본래 유 씨는 황 박사 지지 단체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내부의 균열과 갈등이 심해, 1인 시위로 전환하게 됐다. 그는 “배고프고 추운 것은 참겠지만 졸음을 참기가 가장 힘들다”며 “20시간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고비가 시작 된다”고 말했다. 또, “1인 시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1인 시위의 고충을 토로했다.

취재 중, 유 씨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 씨는 “난 황 박사가 옳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전문 지식과 함께 심증이 아닌 물증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를 원치 않아 모두 말해 줄 수 없지만, 언젠간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내비쳤다.

취재 : 이해완 (아주대 미디어학부 4년), 최중혁 (성균관대 경영학과 3년), 유은영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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