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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배 속 같은 2㎞ 원시 동굴서 ‘고요한 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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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호 24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퐁나께방 국립공원은 동굴 트레킹의 성지로 꼽힌다. 세계 3번째로 큰 항은 동굴을 탐험하고 동굴에서 캠핑 체험도 할 수 있다. 양보라 기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퐁나께방 국립공원은 동굴 트레킹의 성지로 꼽힌다. 세계 3번째로 큰 항은 동굴을 탐험하고 동굴에서 캠핑 체험도 할 수 있다. 양보라 기자

지난해 1~11월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인은 311만 명에 이른다. 최근 한국인 여행자가 몰리는 곳이 다낭·나짱 같은 바닷가 휴양 도시여서 베트남 하면 ‘가성비 좋은 휴양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바다만 즐긴다면 베트남을 절반만 본 것이나 다름없다. 베트남은 국토 절반이 산과 정글이어서다.
베트남 산악지대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행지가 중부 꽝빈(Quang Binh) 주다. 이곳에 200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퐁나께방(Phong Nha Ke Bang) 국립공원’이 있다. 동굴 트레킹 성지로 꼽히는 이곳에서 여행자는 빽빽한 정글을 헤집고 깊숙한 석회 동굴에 찾아 들어가는 수고를 무릅쓴다. 그리고는 기기묘묘한 동굴 안에서 잊지 못할 밤을 보낸다.

아세안의 유산③베트남 퐁나께방 #서울보다 넓은 석회암 국립공원 #정글 뚫고 거머리 떼내며 전지 #동굴 바위 틈새로 달빛 밀려들어 #지상의 소란 벗어나 평온함 만끽

폭우가 빚은 유네스코 자연유산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동굴 트레킹 여행지로 거듭난 퐁나. 양보라 기자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동굴 트레킹 여행지로 거듭난 퐁나. 양보라 기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500㎞ 떨어진 꽝빈 주의 벽촌, 퐁나(Phong Nha) 풍경은 1970년대 우리 농촌을 촬영한 자료 화면을 보는 듯했다. 둥그스름한 동산이 사위를 두르고 있고, 산 밑자락엔 정성껏 빚어놓은 논밭이 펼쳐졌다. 도로 위에 달구지를 끄는 소도 이따금 출몰했다. 3000명이 사는 이 평화로운 농촌에 무슨 근심이 있을까 싶었는데, 퐁나에서 나고 자란 가이드 ‘윰’은 “내 고향은 10여 년 전만 해도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빈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퐁나를 가난하게 만든 건 ‘비’예요. 해마다 홍수가 나서 애써 기른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거든요.”

퐁나 지역이 바다 속에서 융기한 땅임을 증명하는 화석. 양보라 기자

퐁나 지역이 바다 속에서 융기한 땅임을 증명하는 화석. 양보라 기자

연 강수량은 2270㎜로 한국(1200㎜)보다 두 배 많은데, 이 많은 비가 9~11월 석 달 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폭우는 많은 것을 파괴했지만,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바로 퐁나가 자랑하는 세계 최대 면적(2000㎢)의 카르스트(석회) 지대다. 퐁나는 바다에 잠겼다가 5만 년 전 융기한 땅이다. 석회암 틈 사이로 빗물이 줄기차게 파고들어 곳곳에 널찍한 동굴을 뻥뻥 뚫었다. 지금껏 발견된 석회 동굴이 400개에 이르고, 동굴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100㎞가 넘는다. 2000년 베트남 정부는 카르스트 지대이자 원시림인 퐁나의 산간을 퐁나께방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께방’은 퐁나의 옆 동네다. 서울(605㎢)보다 더 넓은 국립공원(857㎢)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재됐다.

비가 많이 내리는 퐁나의 산길은 질척질척한 진창이다. 이 산길을 헤쳐가야 석회 동굴을 만나게 된다. 양보라 기자

비가 많이 내리는 퐁나의 산길은 질척질척한 진창이다. 이 산길을 헤쳐가야 석회 동굴을 만나게 된다. 양보라 기자

정글과 동굴을 탐험하려는 여행객이 퐁나께방 국립공원에 모여들자, 빈궁한 농부였던 퐁나 주민 대다수는 여행 가이드, 홈스테이 운영 등으로 생계 수단을 바꿨다. 그리고 퐁나의 주민은 월 평균 25만원을 벌게 됐다. 베트남 농촌 지역 평균 소득은 1인 월 10만원 수준이다. 윰은 “퐁나 주민은 이제 비가 쏟아져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퐁나께방 국립공원을 개별적으로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트남 정부가 허가한 지역 여행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400개 동굴 중 여행객에게 개방된 동굴은 딱 15곳인데 이 중에는 길이 9㎞, 높이 200m, 폭 150m인 세계 최대 석회 동굴 ‘손둥(Son Doong) 동굴’도 포함됐다. 현지 여행사 ‘옥자일스(Oxails)’가 손둥 동굴을 비롯해 베트남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동굴 ‘항은(Hang En) 동굴’ 트레킹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손둥 동굴은 강물의 수위가 높아 3월께나 개방한다는 말에 항은 동굴 트레킹에 참여하기로 했다. 트레킹에 동행한 여행객은 4명. 여기에 가이드 2명, 안전 가이드 1명, 포터 2명, 요리사 1명이 가세해 모두 10명의 동굴 원정대가 꾸려졌다.

백사장에 텐트, 활짝 열어도 모기 없어

계곡을 30번 건너야 항은 동굴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양보라 기자

계곡을 30번 건너야 항은 동굴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양보라 기자

항은 동굴 트레킹의 첫 여정은 해발 300m에서 해발 10m까지 이어진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길 끝에 동굴 트레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반둥(Ban Doong) 마을이 나타난다. 표고 차가 300m 밖에 안 되는데 뭐가 힘들겠나 싶어 호기롭게 첫발을 뗐지만, 태곳적 원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절감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산길은 말 그대로 진창이었다. 바닥이 찐득찐득해 등산화가 벗겨지기 일쑤였다.

반둥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 양보라 기자

반둥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 양보라 기자

습기가 가득한 정글의 주인은 거머리였다. 거머리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인간을 호시탐탐 노렸다. 행여 미끄러질세라 발바닥에 힘을 주며 걷고,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거머리를 부지런히 떼어내느라 정신없이 산에서 내려갔다. 동굴 트레킹에 이런 장애물이 있는 줄 몰랐다는 말에 가이드 ‘다이’는 “모든 게 모험의 일부라고 생각하라”며 웃었다. 원시림 한복판에서 이 고비를 잘 넘기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정글 트레킹에 나서는 여행자를 수시로 공격하는 거머리. 양보라 기자

정글 트레킹에 나서는 여행자를 수시로 공격하는 거머리. 양보라 기자

동굴 가이드는 베트남 국부 호치민이 즐겨 신었던 '호치민 신발'을 신고 정글을 누빈다. 양보라 기자

동굴 가이드는 베트남 국부 호치민이 즐겨 신었던 '호치민 신발'을 신고 정글을 누빈다. 양보라 기자

1시간 비탈진 산길을 내려와 반둥 마을에서 간식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평탄한 길을 3시간만 걸으면 동굴 입구에 다다른다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뗐지만, 곧 계곡물이 앞을 막았다. 가이드가 아무렇지 않게 계곡을 건너갔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따라나서려는데 “지금부터 숱하게 계곡을 만나니까 벗을 필요 없다”는 충고만 들었다.
하릴없이 계곡물에 첨벙첨벙 발을 담그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신발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정글을 헤치고, 계곡을 건너는 일을 반복했다. 서른 번 물길을 가로질렀더니 어느덧 계곡 앞에서 머뭇거렸던 마음이 사라졌다. 몸은 점점 녹초가 돼가고 거머리와의 싸움도 힘에 부칠 즈음, 원정대원들이 “동굴! 동굴!”을 외쳤다. 절벽 아래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항은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땀과 계곡물에 푹 젖어 온몸이 무거웠는데도 드디어 동굴에 다다랐다는 반가움에 펄쩍펄쩍 만세를 불렀다.

항은 동굴에 고여 있는 푸른빛 호수. 양보라 기자

항은 동굴에 고여 있는 푸른빛 호수. 양보라 기자

항은 동굴 안에는 인공조명이 없어 랜턴을 머리에 달고 암벽을 기어 내려갔다. 목구멍 같이 좁은 터널을 통과하자 폭 200m, 높이 100m, 길이 2㎞에 달하는 거대 동굴의 속살이 드러났다.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났던 고래 배 속이 이런 광경일 거라 짐작했다. 수심 7m의 호수도 고여 있었다. 동굴 틈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자 호숫물이 퍼렇게 빛났다. 동굴에 닿기 위해 흘렸던 땀이 모두 보상되는 광경이었다.

동굴 탐험에 요리사가 동행해 여행자에게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준다. 양보라 기자

동굴 탐험에 요리사가 동행해 여행자에게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준다. 양보라 기자

동굴에서 맛보는 성찬. 양보라 기자

동굴에서 맛보는 성찬. 양보라 기자

호수 주변에는 천연 백사장이 있었다. 풍화한 석회암이 모래가 되어 호수 근처에 쌓인 것이다. 백사장에 설치된 텐트가 동굴에서 하룻밤을 날 숙소였다. 요리사가 동굴에서 만들어 준 따뜻한 밥을 먹은 뒤 텐트에 벌러덩 누웠다. 텐트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는데도 모기가 한 마리가 없었다. 동굴 내부 기온이 연중 15~18도로 유지되는 터라 모기가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동굴에는 모기의 천적인 박쥐가 서식하기 때문이었다.
새까만 어둠이 찾아든 동굴에 바위 틈새로 달빛이 밀려왔다. 억겁의 시간이 만든 석순과 석주가 흐릿하게 빛났다. 지상의 소란스러움이 지하 세계까지는 닿지 못한 듯 동굴의 밤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여행정보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베트남은 한국보다 2시간 느리다. 화폐는 동을 쓴다. 100동 약 5원. 퐁나께방 국립공원은 동호이(Dong Hoi) 국제공항에서 차로 45분 거리다. 한국에서 직항은 없다. 하노이 국제공항에서 국내선을 타면 동호이까지 1시간 소요. 베트남 정부가 지정한 11개 현지 여행사가 당일 투어, 동굴 숙박 상품을 운영한다. 여행사 ‘옥자일스’가 세계 최대 동굴 손둥 동굴(4박5일 약 340만원)과 항은 동굴(1박2일 약 37만원) 트레킹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문 가이드와 포터가 동행해 트레킹 경험이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한아세안센터에서 만든 앱 ‘아세안여행’을 받아가자. 날씨·환율·회화 등 여행정보가 담겨 있다.

꽝빈(베트남)=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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