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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국민은행 파업한 줄도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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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염지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염지현 금융팀 기자

염지현 금융팀 기자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가 무섭다는 말이 있다. 칼을 뽑았는데 칼날이 무디면 더는 위협적이지 않아서다. 19년 만에 총파업 사태까지 이른  KB국민은행의 노동조합 얘기다.

국민은행 노사는 결국 중앙노동위원회가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25일 조합원 찬반 투표를 거쳐 노사 대표가 서명만 하면 4개월간 몸살을 앓았던 임금·단체협약 교섭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잠정 합의안을 들여다보면 서둘러 갈등을 봉합한 인상을 준다.

성과급 지급 기준을 놓고봐도 노사 간 입장은 여전히 엇갈려 ‘불씨’를 남겼다. 합의점을 찾은 건 임금피크제 진입 연령(56세)과 점심시간 1시간 보장뿐이다. 노사 양측에선 “이러려고 파업했나”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결국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한 채 뽑아 든 칼이 악수가 됐다. 노조 추산 9000여 명, 은행 추산 5500여 명이 참여한 지난 8일 총파업에도 영업 현장에서는 큰 혼란이 없었다. 인터넷 게시판 등에선 “스마트폰으로 은행 일을 다 봐서 파업하는 줄도 몰랐다”는 말까지 나왔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국민은행에 따르면 현금 자동입출금기(ATM)와 스마트폰·PC 등을 통한 비대면 거래는 전체의 88%에 달한다. 결국 노조의 총파업은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영업 환경이 바뀌고 있음을 노조가 나서서 증명한 셈이 됐다.

국민은행 임단협 협상을 손익계산서로 따지면 적자다. 양측 모두 제대로 손에 쥔 게 없다. 노조는 1차 파업이 끝난 뒤 설 연휴를 앞둔 이달 말 파업을 예고했다가 철회했다. 노조가 파업을 해봤자 유휴 인력이 많다는 것만 보여줄 뿐이어서 오히려 구조조정의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내부 갈등도 커졌다. 2014년 정규직으로 전환한 최하위 직급(L0)의 과거 경력을 호봉에 반영해 달라는 요구에 기존 정규직 직급(L1)의 일부 직원들은 반발했다. 은행권 취업의 ‘바늘구멍’을 통과한 직원들과 그렇지 않은 직원들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 파업으로 허인 국민은행장은 리더십에 타격을 받았다. 업계에서는 시중 은행장 가운데 첫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원만하게 노사 문제를 풀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노조의 무리한 요구에 끌려다니느라 정작 필요한 ‘미래 먹거리’ 구상에는 시기를 놓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예대마진(대출과 예금의 이자 차이)’에만 의존한 은행 영업은 이제 유효기간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지현 금융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