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Blog] 배우 약 올리거나, 기 살리거나 … 톡톡 튀는 감독 '용병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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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축구에서만 감독의 용병술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상수나 김기덕 영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로 평범한 배우를 비범하게 도약시키는 감독의 탁월한 조련술을 꼽기도 합니다.

용병술은 감독마다 좀 다릅니다. '비열한 거리'의 유하 감독은 "적절한 거리감"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배우와 감독이 '아삼육'이 되면 안 된다는 거죠. 조인성에 따르면 유 감독은 '영리하게 약 올리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조인성의 사투리 연기에 대해 처음엔 "전혀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가 "그것밖에 안 되느냐", 다음엔 "어, 그 느낌 모르는구나" 이런 식으로 서서히 약을 올린다는 거죠. 잔뜩 열 오른 배우가 절로 악착 떨게 만드는 겁니다.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이 자신의 직속 조폭 선배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주문은 "친형 얼굴을 떠올려라"였답니다. 마치 피붙이를 살해하는 듯한 죄의식과 그것을 뛰어넘는 야심이 한눈에 담기기를 바란 거죠. 이런 치밀한 주문 덕에 영화는 '조인성의 재발견'이라는 호평을 얻었습니다.

엄정화가 천재 소년을 지도하는 피아노 강사로 나온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클라이맥스는 더 이상 소년을 가르칠 능력이 없게 된 엄정화가 소년을 해외로 입양시키려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평소 감정표현이 없던 소년은 처음으로 엄정화를 와락 껴안으며 "엄마"라고 울먹입니다. 이때 감독은 자세한 내용을 최후 리허설까지 두 배우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역배우에게만 "대사는 '엄마' 하나"라고 귀띔했답니다.

촬영이 시작되고 감정이 무르익자 감독은 아이를 엄정화의 등 쪽으로 밀었고 엉겁결에 등을 껴안은 아이의 입에서 절로 "엄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연기에 흠칫 놀란 엄정화가 슬픔을 억누르는 순간 객석에는 먹먹한 감동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이처럼 즉흥적이고 리얼한 감정을 최대한 살린 연기 연출 덕분에 영화는 관객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흔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천카이거와 '무극'을 작업했던 장동건은 감독에 대해 "배우가 무엇에 약한지 금세 알아차리더라"고 하더군요. 배우가 칭찬에 약한지, 냉정한 질책에 약한지 빨리 파악하고 배우마다 다른 대처방법을 내놓는다는 거죠. 장동건은 "저는 칭찬에 약한 쪽이라, 계속 칭찬 듣고 계속 잘하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영화제작 현장은 하나의 유기체 조직에 비견되곤 합니다.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 조직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감독의 으뜸가는 능력이고요. 아무나 '감독'이 될 수 없고, 더구나 훌륭한 감독이 되는 게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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