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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조사보다 조서 열람 시간 더 길었다…뚜껑열린 수싸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를 마친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를 마친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를 받은 다음날인 12일 검찰을 다시 찾아 자신이 조사받은 내용과 진술 조서를 열람했다. 하루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조서 열람만을 위해 검찰을 방문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법률 전문가인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과의 수 싸움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양 전 대법원장, 조서 열람만 10시간 이상

양 전 대법원장은 11일 오전 9시30분쯤 검찰에 출석해 약 11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식사 시간과 조사 중간 휴식시간 등을 고려하면 실제 조사 시간은 10시간이 되지 않는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은 3시간 넘게 조서를 열람하다가 중단한 뒤 11시 55분에 귀가했다. 다음날 오후 그는 조서 열람을 위해 최정숙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와 함께 서울중앙지검에 다시 출석했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 조서 열람을 마무리했다. 11~12일 조서를 들여다본 시간이 조사 시간을 넘어선다는 게 검찰관계자의 설명이다.

통상 검찰에 소환된 피의자는 조사가 끝난 뒤 조서를 읽으며 본인의 진술 의도와 다르게 작성된 내용 등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다.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작성된 내용을 두 줄로 긋고 자필로 수정사항을 다시 기재한다. 수정된 부분에는 지장을 찍어 최종 조서를 완성한다. 양 전 대법원장은 조서를 빠짐없이 열람하면서 일부 진술 문구에 대해 검찰에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이틀에 걸쳐 조서를 열람하고 수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조사받은 시간보다 길었다. 법조계에서는 ‘법률 전문가’인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진술과 관련해 법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소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조사 시간보다 조서를 열람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조서를 하나하나 상당히 꼼꼼하게 봤다”고 말했다.

2017년 검찰 조사를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약 14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7시간 30분에 걸쳐 조서를 열람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지난해 3월 약 15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6시간에 걸쳐 조서를 열람했다. 전직 대통령들도 조서 열람 시간이 조사 시간의 반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검찰 “증거 자료 구체적으로 다 보여주는 건 시간낭비”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첫 조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소송 지연,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 사건 등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조사했다. 또 특정 성향 판사들을 사찰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의혹에 관련, 지시 여부 등을 물었다. 검찰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은 대부분 질문에 “잘 모르겠다”,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적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비공개 재소환에 대비해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비공개 재소환에 대비해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양 전 대법원장이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부인하자 검찰은 증거를 다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수 싸움에 임하고 있다. 재판 단계까지 고려했을 때 혐의를 아예 부인하는 피의자에게 핵심 증거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핵심 혐의인 일제 강제징용 소송 개입 여부와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한 조사를 검찰이 하루 만에 마무리한 것도 이런 수 싸움의 일환이다.

검찰은 김앤장 측이 일제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과 독대한 내용이 담긴 문건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업무수첩을 확보한 상태다. 이 전 상임위원의 업무수첩에는 양 전 대법원장과의 독대에서 기록한 내용이 적힌 것으로 알려졌다.

차장검사 출신의 변호사는 “어떤 질문을 해도 기억이 안 난다는 피의자에게 가지고 있는 증거를 다 보여주지 않는 건 검사가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수사기법 중 하나”라며 “양 전 대법원장과 검찰은 이미 재판 단계에서 유‧무죄를 다투는 것까지 계산해서 수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번주 양 전 대법원장을 비공개로 한두 차례 더 불러 추가 조사를 할 방침이다. 이르면 14일 재소환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구속영장 청구 등 신병처리 방향과 관련자 기소 여부 등을 결정할 계획이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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