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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치아 타 없어진 고종의 주검, 들불 같은 민족 저항 불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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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호 09면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②

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 장례식 때 큰 상여가 종로를 지나고 있는 장면. 이틀 전인 3월 1일은 장례 예행연습일이었다. 3·1운동은 고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고종 독살 소문은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서울 20세기, 100년의 사진 기록』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 장례식 때 큰 상여가 종로를 지나고 있는 장면. 이틀 전인 3월 1일은 장례 예행연습일이었다. 3·1운동은 고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고종 독살 소문은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서울 20세기, 100년의 사진 기록』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웅장한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조선총독부의 보도 통제로 엿새가 지나 3월 7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당일 시위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잘 알지 못한다. 3·1운동이라면 민족 대표 33인과 독립선언서를 떠올리면서 정작 만세운동의 시발인 경성(서울)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란 자료가 있다. 시위 때 검거된 학생 210명에게 내려진 법원 판결문이다. 이 자료에 학생 대표들의 모의와 서울 시위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깨알같이 촘촘하게 쓴 18쪽이나 되는 분량 때문인지 이를 눈여겨 본 사람이 없다.

“을사조약 승인 거부하면 없애라” #데라우치 통감, 후임에 비밀 지령 #장례식 맞춰 3월 1일로 거사 택일 #고종 때 세운 학교 출신들이 주도 #한 달 뒤 상해서 임시정부 수립 #‘대한제국 잇는 민국’ 국호로 정해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의 ‘이태왕’(고종황제)이 붕어한 뒤 바로 학생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움직였다. 1월 하순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박희도, 이갑성 두 청년에게 학생 대표들을 만나라고 지시했다. 2월 하순까지 다섯 차례 교회와 목사 집에서 비밀스럽게 만나 모의하였다. 종교계 및 사회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전국에 내려보내는 일을 맡고,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전담하는 공조체제를 약속했다. 경성의전, 경성공전, 경성전수(법전),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등 관립학교 학생 대표들이 앞장서고 연희전문, 보성법률상업전문 및 사립 중등학교 대표들이 합세하였다. 관립(국립) 학교는 모두 황제 재위 중에 근대화 역군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학교들이다. 총독부가 황제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학생들을 더 자극하였다.

‘결정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3월 1일과 5일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 1910년 8월 29일 강제 병합 후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황제는 왕, 태황제는 태왕으로 바뀌었다, 황실은 일본 천황가 아래 ‘이왕가’가 되었다. 그래서 국장은 일본 황실 행사로 3월 3일 거행한다고 발표되었다. 모든 국장 절차는 일본식으로 하되 대여(大輿)만은 조선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조선식으로 한다고 발표되었다. 3월 1일, 대여 운구 예행연습으로 많은 사람이 대한문 앞에 모였다. 행사가 끝날 무렵 탑골공원에서 경성의전 학생 한위건(韓偉鍵)이 팔각정 위에 올라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거리 시위에 들어갔다. 서쪽으로 향한 대열의 한 무리가 대한문 앞으로 달려와 묵념으로 애도를 표하자 여기 모인 군중도 즉시 시위에 들어갔다.

‘결정서’는 학생들의 시위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크게 동·서로 나뉘어, 서로 향한 시위대열은 다시 둘로 나뉘고 그중 1대는 다시 갑·을대로 나뉘어 행진한 길을 하나하나 밝혔다. 시작할 때 동서로 방향을 달리했어도 모든 시위대가 대한문 앞, 미국과 프랑스 영사관은 다 거쳤다. 대한문 앞에서는 고개 숙여 조의를 표했고, 두 영사관 앞에서는 더 높은 소리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두 나라는 현재 진행 중인 파리 평화회의 주최국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질 때까지 거리를 누빈 시위대열은 대부분 본정(충무로), 영락정(영락교회 부근), 명치정(명동) 등 일본인 거주 구역 앞에서 마무리 시위를 하고 해산하였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3월 5일의 시위는 더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3일의 국장에 이어 5일은 반혼제 즉 삼우제 날이었다. 상주인 ‘이왕’(순종)이 홍릉에 가서 혼백을 모셔오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8시부터 남대문역(현 서울역)과 덕수궁 대한문 사이 일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9시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월 모의 때, 학생 대표들은 2인 1조로 임무를 정하면서 1일 시위에서 한 사람은 반드시 체포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2차 시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3월 4일 저녁 무사한 대표들이 모여 다음날 시위를 점검하였다. 선언문을 낭독한 한위건도 회합에 나타났다. 5일 아침 연희전문의 김원벽, 보성전문의 강기덕은 인력거를 타고 달리면서 ‘삐라’(전단)를 뿌렸다. 1차 시위 때와는 달리 수많은 깃발이 등장하고, 붉은색 포(赤布)를 나누어 팔뚝에 두르고 기세를 돋았다. ‘조선독립신문’ ‘각성호회보’ 등 전단 신문들이 뿌려졌다. 한위건이 쓴 ‘동포야 이러나거라’가 많은 감동을 자아냈다. 시위는 밤늦도록 진행되어 일부는 동대문 쪽으로 가서 금곡 홍릉에서 돌아오는 황제(순종)를 맞이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 고종황제 죽음과 떼어놓을 수가 없다. 조선총독부는 왜 황제를 독살했던가? 1909년 10월 26일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그 안중근 의사가 이듬해 3월 26일 처형된 후,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3대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육군성의 인력을 동원해 병합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7월 말에 서울에 도착하여 동정을 살피고 8월 하순에 ‘병합’을 강제하였다. 9월부터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무단통치체제를 만들고 1916년 8월에 본국 총리대신으로 영전하여 조선을 떠났다.

데라우치는 매우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총리대신으로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준비 정황을 보고받으면서 덕수궁의 ‘이태왕’(고종)이 다시 움직일 것을 걱정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대표를 보내 일본의 불법 강제 국권 탈취를 폭로하게 하여 일본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던 것을 상기하면 고종이 다시 움직일 것이 뻔하다고 봤다. 하얼빈 사건의 핵심 배후가 서울의 태황제라는 기밀 정탐보고를 받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는 1918년 9월 쌀 파동으로 총리대신에서 물러났지만, 후임 하세가와 총독에게 비밀리에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이태왕’에게 재임 중에 거부했던 ‘1905년 보호조약’을 지금이라도 승인하는 문서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없애라는 것이었다. 1919년 1월 18일 황제는 총독부가 보낸 사회대표들의 진언을 듣고 호통을 쳐 내보냈다. 그리고 이틀 뒤 갑자기 승하했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황제는 혀와 치아가 타 없어지고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3월 독립만세 함성의 힘으로 4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운 사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은 황제의 주권수호 정신을 기려 새로 세우는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을 잇는 민국이란 뜻으로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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