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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회사원 밤엔 레슬러… 김일·이왕표 길 따르는 김민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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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WWA 극동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어깨에 멘 김민호. 그는 ’김일·이왕표 선생님의 땀과 피가 묻어 더 감격“이라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장소 제공 Pro Wrestling Society]

WWA 극동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어깨에 멘 김민호. 그는 ’김일·이왕표 선생님의 땀과 피가 묻어 더 감격“이라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장소 제공 Pro Wrestling Society]

‘박치기왕’ 김일(1929~2006)이 활약했던 1960~70년대 프로레슬링은 ‘국민 스포츠’였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점점 줄어들었다. 김일의 후계자로 한국 레슬링을 지켜온 이왕표는 지난해 9월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선배의 뜻을 이어받아 김일과 이왕표의 후계자가 되고싶은 사나이가 있다. 김일과 이왕표가 차지했던 바로 그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른 프로레슬러 김민호(31)다.

WWA 극동 헤비급 챔프 올라 #김일이 사용한 챔피언 벨트 둘러 #필살기는 목·뒤통수 후려치기 #“프로레슬링에 봄비 올 날 기다려”

키 1m84㎝, 몸무게 105㎏의 거구인 김민호는 ‘레슬링 키드’다. 초등학교 시절인 1990년대 WWF(지금은 WWE)에서 헐크 호건과 안드레 더 자이언트의 경기를 보면서 프로레슬링에 빠져들었다. 이왕표가 이끄는 WWA가 주관하는 레슬링 경기도 지방까지 따라가 모두 지켜봤다. 김민호는 “혼자 찜질방에서 자면서 경기를 보러 다녔다. 프로레슬링이 ‘(각본이 있는)엔터테인먼트’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빨이 뽑혀나가고, 피 냄새가 나는 걸 보면서 ‘진짜’ 격투기라는 걸 알았다. 사나이의 무도 세계가 정말 멋져 보여서 ‘꼭 레슬링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스무살이 되면 찾아오라’는 프로레슬링 선배들의 말에 그는 태권도·유도·씨름 등을 배우면서 레슬링 선수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김민호에게 직접 챔피언 벨트를 감아준 고 이왕표. 얼마 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 장태현 작가]

김민호에게 직접 챔피언 벨트를 감아준 고 이왕표. 얼마 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 장태현 작가]

2006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장으로 이왕표 사범을 찾아갔다. 당시 체중은 140㎏. 이왕표는 “몸이 너무 크다. 체중을 줄이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이를 악물고 감량한 끝에 5개월 반 만에 40㎏을 뺐다. 그날로 ‘이왕표 도장 2기생’이 됐다. 이왕표의 수제자인 노지심을 비롯해 홍상진·김종왕·안성기 등 2세대 선배들이 그를 가르쳤다.

레슬러가 되는 길은 험난했다. 하루에 스쿼트 1000개, 푸시업 300개, 복근 운동 500회에 브릿지, 낙법 훈련까지 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스파링을 하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김민호는 “‘쇼인데 뭐가 힘들겠나’하는 생각으로 도장을 찾았다가 한 달도 안 돼서 그만둔 친구들도 많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결국 나 하나”라며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만 쉬었는데 그날은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스승 노지심의 주선으로 6개월간 일본 레슬링 단체 NOAH로 유학을 떠난 뒤엔 청소, 설거지, 밥 차리기 등 궂은일을 하면서 레슬링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는 2년 만인 2008년 꿈에 그리던 데뷔전을 치렀다.

김일(左), 이왕표(右)

김일(左), 이왕표(右)

1960년대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엄청났다. 국민들은 김일이 박치기로 거구의 서양 선수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에 열광했다. ‘레슬링은 미리 각본을 짜놓은 쇼’라는 폭로에도 70년대까지 승승장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 전용 체육관을 지어주기도 했다. 1980~90년대엔 이왕표가 한국 레슬링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젠 옛날 이야기다. 김민호는 “가장 최근 열린 프로레슬링 경기 관객이 900명 정도였다. 그것도 많은 편”이라고 했다. 1년에 3~5차례 대회가 열리는 데 파이트머니는 차비 수준이고, TV 중계는 꿈같은 이야기다. 미국과 일본에선 여전히 프로레슬링이 인기 스포츠지만 한국에선 마이너 중의 마이너다.

자연스럽게 국내 프로레슬러들은 생업을 위해 ‘투잡족’이 됐다. 낮에는 은행원으로 살다 밤에는 악역 레슬러로 변신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반칙왕’은 현실 그대로다. 김민호도 보안요원, 보험설계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김민호는 “지금은 제2금융권에서 대출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영업직이라 매일 출근할 필요가 없다. 회사에서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일과 레슬링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김민호는 데뷔 10년 만에 꿈을 이뤘다. 지난해 5월 동갑내기 친구 조경호를 꺾고 스승 노지심이 반납한 WWA 극동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김일·이왕표·노지심에 이은 제4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당시 이왕표 WWA 총재는 김민호의 허리에 직접 벨트를 감아줬다.  김민호는 “1963년 김일 선생님이 타이틀을 차지하셨을 때부터 사용한 벨트다. 함께 고생한 친구 조경호와 대결한 결과여서 더욱 뜻깊었다”며 “경기가 끝난 뒤 이왕표 회장님이 벨트를 감아주시는데 정말 꿈만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김민호는 8개월이 지나도록 방어전을 치르지 못했다. 이왕표 WWA 회장이 지난 9월 담도암으로 별세한 뒤 국내 프로레슬링은 수장을 잃고 표류했다. 예정됐던 경기는 취소됐고, 체육관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챔피언 김민호도 후배가 운영하는 체육관을 빌려 연습하는 처지다. 김민호는 “과거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강화하는 게 프로레슬링의 숙제다. 신임 홍상진 대표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팬을 찾아가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레슬러들에겐 '기믹'이 있다. 선수의 캐릭터 또는 스타일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설정이다. 김민호의 기믹은 '근성'이다. 김일 선생이 강조했던 참을 인(忍)자를 유니폼에도 새겼다. 그는 "사실 나는 마이크워크(링에서 말을 하는 능력)가 좋은 편이 아니다. 근성이 내 캐릭터라 늘 힘든 경기를 한다"면서 "얼굴이나 성격도 착하게 생긴 편이라 한 번도 악역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악역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기믹만큰 중요한 건 승부를 결정짓는 ‘필살기’다. 김일은 ‘원폭 박치기’, 이왕표는 ‘플라잉 드롭킥’이 필살기였다. 김민호의 피니시 기술은 상대를 팔뚝으로 때리는 래리어트(상대의 목이나 뒤통수를 팔로 후려치는 기술)계열이다. 김민호는 “내가 무대에 등장할 때 나오는 피니시 이름와 등장음악이 ‘봄이여 오라’다. 한국 프로레슬링에 봄비가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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