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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옵션과 저항 옵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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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 소비자일 때 그 결정은 상대적으로 쉽다. 특정 기업의 제품에 문제가 있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고객은 다른 회사 제품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탈한다.

기업이나 조직의 일원으로 이 고민과 마주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도망칠까, 변화를 모색하며 견뎌볼까.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굴레도 있다. 가족이나 국가다. 선택지는 오히려 단순할 수 있다. 침묵한 채 참거나 저항하거나.

세계적인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의 책『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원제: Exit, Voice and Loyalty)는 이 문제를 천착한 역작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이 이른바 ‘탈출 옵션(Exit Option)’과 ‘저항 옵션(Voice Option)’이다.

탈출 옵션은 어떤 상황이나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다른 탈출구를 찾는 행위다. 탈출로 조직에 경고음을 울리는 소극적 문제 제기다. 저항 옵션은 말 그대로 문제를 바꾸려 항의하고 맞서며 원상회복을 시도한다. 탈출과 저항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면 조직이나 체제에 남아 상황을 견디며 회복 방안을 모색하는 충성파가 된다. 항의로 개선을 시도하지만 답이 없다면 마지막 수순은 이탈이 된다.

탈출 옵션과 저항 옵션을 떠올린 건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대학 선후배가 3일 낸 호소문 때문이다. 신 전 사무관은 청와대의 KT&G 인사 개입과 적자 국채 발행 시도 의혹 등을 제기한 뒤 이어지는 논란 속에 자살 시도를 했다.

선후배들은 논쟁적 사안인 만큼 관점은 다를 수 있고 그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가 직을 버리고 나와 사회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무모한 도전을 했고, 인생 선배들이 교훈을 찾아 우리 사회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주길 부탁했다.

호소문 대로면 신 전 사무관은 저항 옵션을 쓴 셈이다. 그의 문제 제기는 논쟁적이다. 발화점도 높다. 반대편의 주장대로 근거가 없을 수도 있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을 비롯한 일부의 대응은 사회의 선배라고 하기엔 어른스럽지 않았다. 감정적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건설적 논쟁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문제를 바꾸려는 항의나 저항이 아닌 현실에 눈감는 자조 어린 포기일 수밖에 없다. 탈출 옵션을 종용하는 사회인 셈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다. 단, 여기에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말 없이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