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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스비 콜랙숀’ 할아버지가 논 1만 마지기 팔아 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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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호 19면

큰 사진. 문화재 수집으로 ‘문화보국’을 외치던 간송 전형필 선생은 3·1운동에 물심양면으로 참가한 보성중학교를 1940년 인수해 ‘교육보국’에도 나섰다. 일제 강점기 시절 보성중학교 졸업사진 앞에 선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신인섭 기자]

큰 사진. 문화재 수집으로 ‘문화보국’을 외치던 간송 전형필 선생은 3·1운동에 물심양면으로 참가한 보성중학교를 1940년 인수해 ‘교육보국’에도 나섰다. 일제 강점기 시절 보성중학교 졸업사진 앞에 선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신인섭 기자]

일제의 문화재 수탈에 맞서 만석꾼 재산을 오롯이 우리 문화유산 수집에 바친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의 정신은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더욱 빛난다. 젊었을 적부터 키워온 그의 예리한 안목과 결연한 의지와 두둑한 배짱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조상들이 남긴 예술품의 존재조차 모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4일 서울 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시작된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3월 31일까지)은 간송의 그런 열정과 그 열정이 만든 결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지난해부터 간송미술관을 맡게 된 간송의 손자 전인건(48) 관장이 기획에 참가한 첫 전시이기도 하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DDP서 ‘삼일운동 100년 특별전’ #재밌는 사연 담긴 국보급 60여 점 #이르면 가을부터 성북동 전시 재개 #할아버지 문화보국 정신 되살릴 것

간송미술관 소장품전이 성북동 보화각을 나와 DDP에서 열린 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
“2014년 ‘간송문화전 1부,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가 시작이었다. 새로 문을 연 DDP와 함께 보낸 세월들이다. 처음에 3년, 다음에 2년을 연장했다. 이번 전시를 끝으로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봄과 가을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빠르면 올 가을부터 재개한다.”
간송 소장품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간송의 수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사라지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냥 컬렉터가 예를들어 김홍도의 그림만 모은다면, 간송은 단원뿐 아니라 그의 스승과 제자에 이르기까지 계통을 파악해 모두 수집했다. 후대가 미술사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도 중요한 것은 같은 책이라도 2권 이상 사들였다. 상태가 좋은 것은 보관용이고, 나머지는 연구용으로 쓰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에서 부각하고자 한 것은.
“세 가지다. 우선 대한제국 시절 탁지부대신을 지낸 석현 이용익 선생이 1906년 설립한 보성중학교를 간송이 40년 재단법인 동성학원을 설립해 인수했는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3·1운동과 보성 간송과 보성이라는 맥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간송은 일본인 골동상이 요구하는 거금 2만원(당시 기와집 10채 값)을 그자리에서 꺼내 주고 품에 안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13세기·사진 왼쪽), 36년 경성미술구락부에서 낙찰받은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18세기·오른쪽). [사진 간송미술관]

간송은 일본인 골동상이 요구하는 거금 2만원(당시 기와집 10채 값)을 그자리에서 꺼내 주고 품에 안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13세기·사진 왼쪽), 36년 경성미술구락부에서 낙찰받은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18세기·오른쪽). [사진 간송미술관]

어떤 점에서 그런가.
“3·1운동의 기폭제는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벌인 2·8독립선언인데, 이를 주도했던 보성 출신의 송계백이 2·8독립선언문을 몰래 가지고 들어와 보성 선배 현상윤(고려대 초대 총장)에게 전했고, 이것이 의암 손병희(천도교 3대 교주) 선생에게 이어지면서 종교 지도자 33인이 참가하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3·1운동 당시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3만 5000장 전량이 보성학교 인쇄소에서 프린트됐고 학생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간송은 왜 보성중학교를 인수했나.
“간송의 스승으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보성의 운영이사였는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직간접적인 압력에 학교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전하며 ‘문 닫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8년 조선어교육 금지령 이후에도 보성에서는 오랫동안 한글이 사용됐다. 특히 일제 말기 각급 학교에 일본인 교장들이 부임했는데, 보성은 일본인 교장이 없었던 유일한 학교였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경성미술구락부 이야기다. 지금 명동 프린스호텔 자리에 있던 경성미술구락부는 일제가 우리나라와 중국으로부터 약탈하거나 헐값에 매입한 물건들을 팔아넘기기 위해 22년 경성에 설립했다. 간송의 입장에서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최전선인 셈이었다. 조선인은 참가가 어려워 간송은 신보 기조(新保喜三)라는 눈썰미 좋고 신의 있는 일본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각종 문화재를 사모았다. 이곳에서 간송이 구입한 예술품 중 주요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나중에 국보 제 294호로 지정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다. 키가 42cm에 달하는 이 커다란 유백색 병은 국화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다, 청색·갈색·홍색이 동시에 구현된 희귀한 명품이다. 이 세 가지 색을 내기위해서는 각각 산화코발트·산화철·산화동을 써야하는데, 세 안료 모두 성질이 다르고 소성 온도와 가마 분위기에 따라 발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떻게 이 색을 동시에 구현해냈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이 명품을 간송은 어떻게 손에 넣었나.
“일설에는 한 농부가 밭에서 캐내 막걸리 병으로 쓰던 것이 시장에서 눈에 띄었다고 하는데, 이 병 얘기를 듣고 경성을 찾은  일본 최고의 세계적인 골동회사 야마나카 상회의 주인인 야마나카와 36년 11월 22일 맞붙게 되었다.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시절, 호가가 8000원을 넘기면서부터 두 사람만의 치열한 랠리로 이어졌다. 결국 1만4580원을 부른 간송에게 낙찰됐고, 이는 경성미술구락부 설립 이래 최고가였다. 당시 신문에 ‘간송의 쾌거’라는 기사가 날 정도로 화제가 됐다.”
흥미진진하다. 세 번째 코너인 ‘갇스비 콜랙숀’은 또 어떤 것인가.
“영국 귀족 존 개스비(Sir John Gadsby)는 20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국제변호사인데, 고려청자에 빠져 20년간 수집해온 인물이다. 그가 수집품을 팔고 귀국하려 한다는 소식에 공주 일대 만 마지기 땅을 판 돈을 들고 급히 도쿄로 달려간 간송은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그의 최고급 수집품 20점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중 국보가 4점, 보물이 5점 나왔을 정도로 퀄리티가 높다.”
새로 중책을 맡았다. 포부는.
“좋은 미술관은 전시와 교육과 연구가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간송의 소장품을 더 많은 분들이 보고 즐기게 하고 싶다. 간송이라는 브랜드를 확장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을 다양한 채널로 널리 알리고 싶다. 하이 아트라고 해서 재미가 없을 이유는 없지 않나. 사람들은 돈을 내면 흥미로운 경험을 얻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간송미술관의 경쟁자는 다른 전시장이 아니라 영화관이다. 100명 중 20명이라도 간송미술관에 와서 즐거웠다고 하신다면, 간송이 미술품 수집한 보람을 느끼실 것 같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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