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지급된 어린이집 보조금이지만, 환수 못하는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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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원장이 자기 딸을 보육도우미로 채용해 국가 보조금을 부당 수령했어도 “보조금을 환수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어린이집 이미지 사진. [중앙DB]

어린이집 이미지 사진. [중앙DB]

서울시의 사업계획서에는 ‘어린이집 운영자의 친인척을 보육도우미로 채용하면 보육도우미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고 돼 있다. 하지만 B원장은 지난 2017년 5월부터 자기 딸을 보육도우미로 채용하고, 보조금 명목으로 서울시로부터 217만여원을 받았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A구청은 보조금을 돌려 달라 했고, B원장이 돌려주지 않자 운영정지 처분을 내렸다. B원장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B원장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부장 박성규)는 “서울시 A구청이 어린이집 원장 B씨에게 제기한 보조금 반환 명령 처분은 부당하다”며 “보조금을 반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려진 영업 정지 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고 31일 밝혔다.

B원장이 서울시 규정을 위반했는데도 이런 판결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시 A구청이 B원장의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B원장은 “딸을 채용했던 2017년 당시 서울시에 그런 규정이 있는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A구청은 “B원장이 불법 행위를 몰랐을 리 없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B원장의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시 A구청의 '안일한' 행정 집행이 문제"

법원이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꽤 간단했다. B원장이 2017년 자기 딸을 보육도우미로 등록할 때 ‘모녀관계’라는 사실을 이미 적어 냈기 때문이다. A구청은 “그런 사실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보조금을 지급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지만, 재판부는 “숨기려는 사람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적어 냈을 리가 없다”고 판시했다. 또 재판부는 '각 자치구는 보육도우미와 원장의 친인척 여부를 철저히 확인하라'고 지시한 서울시 공문을 예로 들기도 했다. 해당 자치구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서울시 보육사업계획서 분량도 B원장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됐다. 재판부는 “서울시 보육사업안내에 보육도우미 보조금 지급 제한 규정이 있으나, 총 400장 가량으로 구성돼 있어 B원장이 규정을 제대로 인지했다고 보기도 다소 어렵다”고 밝혔다.

A구청 측은 재판 과정에서 “B원장이 공개채용 원칙을 어기고 딸을 부정 채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재판부는 “공개채용 위반은 A구청이 애당초 처분 사유로 삼았던 게 아니다”며 해당 내용을 심리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동 로펌의 한 변호사는 “B원장의 고의성 여부는 A구청 측에서 입증해야 하는데, 결국 하나도 입증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무집행이 안일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라며 “처음부터 제대로 절차가 진행됐다면 보조금이 잘못 지급됐을 리도 없었을 거고, 재판 과정에서 ‘세금 낭비’가 이뤄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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