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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소설 읽는 주부·전직 CEO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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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호 31면

책 읽는 마을 (18)·끝 서울 대치동 ENCD

서울 대치동의 영어 소설 읽기 모임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준표·손종형·임일규·이정석씨, 뒷줄 왼쪽부터 양민영·윤정선·조영희·강민아·연회성씨. 4년 동안 영어 원서 소설 네 권을 읽었다.

서울 대치동의 영어 소설 읽기 모임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준표·손종형·임일규·이정석씨, 뒷줄 왼쪽부터 양민영·윤정선·조영희·강민아·연회성씨. 4년 동안 영어 원서 소설 네 권을 읽었다.

“Certainly if the fascists were to be executed by the people, 확실하게 사람들이 파시스트들을 처형할 것이라면, it was better for all the people to have a part in it,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서 그것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and I wished to share the guilt as much as any, just as I hoped to share in the benefits when the town should be ours, 그리고 나는 바랐는데, 맨 뒤에서부터 하면은요, 이 도시가 우리 것이 됐을 때 그 이익을 나누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길트를, 그러니까 죄의식을 나눌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

주민 12명 4년째 원서로 감상 #“주변에 빛과 소금 선진국형 모임”

세 자녀를 둔 전업주부 제니퍼, 아니 연회성(56)씨가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영어 문장들을 읽고 해석해나간다. 지난 24일 서울 대치동의 영어 소설 읽기 모임 풍경이다. 모임에서 부르는 영어 이름이 찰스인 김준표(69)씨가 묻는다. 평생 무역업에 종사하다 3년 전 은퇴한 김씨는 영어가 결코 낯설지 않다. “‘As much as any’에서 ‘any’는 한 문장을 한 단어로 압축해 써놓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체니, 이정석(69)씨가 연회성씨 대신 답한다. “내 생각에 ‘some’이 나온다면 그냥 있다는 게 어떻든 전제가 되는 것 같고, ‘any’가 왔다면, 없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뜻이 아닐까요?” 모임의 49년생 3총사 중 한 명인 이씨 역시 평생 영국계 회사에서 일했다. 해석에 힘이 실려 있었다.

‘ENCD(English Novel Class in Daechidong)’ 모임은 2015년 만들어졌다. 짐작하셨겠지만 영어 원서로 소설을 읽는 모임이다. 강남문화재단의 영어회화 강좌가 모태다. 영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 반대로 영어에 한 맺힌 사람, 영어 원서 소설 읽기가 평생 꿈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고 했다. 전체 12명 가운데 남성 회원은 60~70대, 여성 회원은 40~50대가 가장 많다. 각자 생업 혹은 자녀교육이나 가사라는 긴급한 삶의 의무에서 놓여나 비로소 한숨 돌리게 되자 나 자신을 찾자고 시작한 게 영어소설 읽기다.

이날 읽은 책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고전 『For Whom the Bell Tolls(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파시스트를 잔혹하게 살해한 공화파 지지자들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소설의 4분의 1쯤 되는 대목이다. 날고 기는 사람에게도 영어 소설 읽기는 쉽지 않다. 회원들은 그래서 같이 읽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매주 월·수 두 차례, 다섯 명이 돌아가며 한쪽씩 읽고 해석한 다음 문맥, 어려운 표현, 작품의 의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런 거북이걸음이다 보니 4년째이지만 지금까지 네 권을 완독했을 뿐이다. 시드니 셀던의 기업 소설 『Blood Line(화려한 혈통)』, 할레드 호세이니의 베스트셀러 『The Kite Runner(연을 쫓는 아이)』, 제인 오스틴의 고전 『Pride and Prejudice(오만과 편견)』, 미국 작가 니컬러스 스파크스의 『The Last Song(라스트 송)』, 이렇게다. 『For Whom…』은 완독까지 1년을 본다고 했다.

어려운 만큼 회원들의 만족도는 큰 듯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 한국지사장을 지낸 제이, 손종형(69)씨는 “번역으로 인한 왜곡 없이 작가의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멕, 윤정선(49)씨는 “오늘 새벽 2시까지 발표 준비를 했다. 그 시간까지 공부하던 고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 떳떳했다”고 말했다.

지방병무청장을 지내고 지금은 네트워크 회사 대성텔레콤의 부사장으로 일하는 구스타브 임일규(62)씨는 “내 삶의 지표가 글로벌 젠틀맨이다. 철학·문학·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소양을 쌓기 위해 노력해왔다. 사람들이 대치동 하면 학원만 생각하는데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선진국형 모임도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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