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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규식 100년전 프랑스 고별연설 내용 최초 확인

중앙일보

입력

독립운동가 김규식(왼쪽)이 1919년 8월 6일 파리를 떠나며 한 고별 연설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의 기사(오른쪽). 그의 고별 연설 내용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불사학자 이장규씨 제공=연합뉴스]

독립운동가 김규식(왼쪽)이 1919년 8월 6일 파리를 떠나며 한 고별 연설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의 기사(오른쪽). 그의 고별 연설 내용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불사학자 이장규씨 제공=연합뉴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대표를 지낸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950년)이 파리를 떠나기 직전인 1919년 8월 초 서구 지식인들 앞에서 연설한 내용이 최초로 발견됐다. 김규식 선생은 당시 연설에서 한국 문제에 무관심한 서구 열강들의 태도에 울분을 토했다.

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파리 7대 박사과정)씨는 최근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서 김규식 선생의 1919년 8월 초 연설 내용이 기록된 자료를 찾아냈다고 23일(현지시간) 밝혔다. 이장규씨에 따르면 김규식 선생의 발언은 1919년 8월 8일자 프랑스 일간 '라 랑테른'(La Lanterne)의 한 기사에 담겨있었다. '뒤파얄에서의 한국 : 정말 아시아의 알자스-로렌이 존재하는가' 제목의 기사에는 1919년 8월 6일 열린 것으로 알려진 파리외신기자클럽 연회 겸 김규식 선생의 환송연 상황이 담겼다.

'외디프(오이디푸스)'라는 필명의 기자가 작성한 해당 기사에는 김규식 선생의 발언이 적혀 있다. 외디프 기자는 김규식 선생의 발언을 짧게 요약하고, 평가했다. 기사에 따르면 김규식 선생은 당시 자신의 환송연 연설에서 서구 열강들이 한국 문제에 무관심하다며 성토했다. 김규식 선생은 "사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누가 옛날 선원들이 섬으로만 알았던 머나먼 한국을 걱정하겠습니까. 거의 없을 겁니다. 있다면 아마 한국의 매력적인 수도이고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에 직접 가볼 만큼의 호기심을 가졌던 루이 마랑 씨 밖에 없겠지요"라고 말했다. 루이 마랑은 당시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한국 친우회'를 만드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이어 김규식 선생은 식민지 해방문제에 적대적이었던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태도에 절망했다고 외디프 기자는 전했다. 외디프 기자는 "(김규식) 파리평화회의의 한국대표단장은 이런 무관심에 대해 성토했다"면서 "4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고 독립국가로 존재했다가 지금 일본의 속박 아래 꼼짝 못 하고 떨고 있는 2000만 영혼의 간청에도 성의 있게 답하지 않는, 정의와 사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에 그는 경악했다"고 적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이 1919년 8월 6일 파리를 떠나며 한 고별 연설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의 기사. 김규식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그의 고별 연설 내용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불사학자 이장규씨 제공=연합뉴스]

독립운동가 김규식이 1919년 8월 6일 파리를 떠나며 한 고별 연설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의 기사. 김규식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그의 고별 연설 내용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불사학자 이장규씨 제공=연합뉴스]

그러면서 김규식 선생의 연설이 매우 격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외디프 기자는 "한국은 영주국(프랑스)에도 부드럽지 않았다. 이 관리(김규식)로부터 나온 비난에는 일상적인 그런 외교적 태도는 전혀 없었다. (프랑스) 외무부의 강경파, 가령 아시아 담당 부국장 구(Gout)씨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멱살이 잡혔을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국 침탈을 프랑스·독일의 접경지역인 '알자스-로렌'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알자스-로렌은 19세기 후반 독일이 강제병합했다가 1차대전 후 프랑스가 되찾은 땅이다. 외디프 기자는 "이 자리의 결론은 일본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알자스-로렌을 힘겹게 떠안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기사를 끝맺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연회에는 루이 마랑 프랑스 국회의원을 비롯해 이유잉 중국 베이징대 교수, 미노르 전 러시아 국회의장,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한 미국인 기번씨 등 60여명의 인사가 참여했다. 이들은 김규식 선생의 연설을 경청하며 한국을 지지하고 일본을 비판하는 발언을 돌아가면서 했다고 외디프 기자는 전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묘 [중앙포토]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묘 [중앙포토]

한편 해당 기사에서 소개한 '김규식 선생 환송연'은 현재 사료로 남아있는 '임시정부 구주의 우리사업 보고서'에도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사료에 따르면 1919년 8월 6일 '파리만국기자구락부'에서 김규식의 환송연이 열렸고, 70여 명이 모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축사를 낭독했고, 김규식 선생이 보고 연설을 한 뒤 내빈이 돌아가며 축사했다고 한다. 또 마지막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김규식 선생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연설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번에 발견된 자료는 임시정부가 파리에서 펼친 독립운동의 생생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임시정부 부주석까지 지낸 김규식 선생의 활동을 기록한 관련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큰 희소성을 가진다.

국민대 사학과 장석흥 교수는 "김규식이 파리를 떠나기 직전 연설을 한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기사를 찾아낸 이장규 씨는 "김규식이 당시 프랑스와 서구 열강에 전한 내용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1차대전 직후 열강들이 모인 파리평화의에서 냉대를 받았던 현실이 연설을 직접 들은 프랑스 기자의 글에 생생하게 담겼다"고 평가했다. 파리 7대 한국학과 마리오랑주리베라산 교수(한국근현대사)는 오는 27일 서울 광복회관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서 '3·1운동과 프랑스 언론'을 발표하며 이 기사도 함께 소개할 예정이다.

김규식 선생(1881~1950년)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마치는 등 국제적 안목을 길렀다. 이후 귀국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파리평화회의 한국대표로 발탁돼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파리로 건너가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임정 외무총장과 파리위원부 대표를 겸했다. 5개월간 서구 열강 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이번에 발견된 기사 속 환송연은 미국 출국을 코앞에 두고 열린 것이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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