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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전범 아이히만, 평범한 악인 아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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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호 31면

책 속으로

현대사 몽타주

현대사 몽타주

현대사 몽타주
이동기 지음, 돌베개

사회구조보다 개인 책임 중시하는 #진보 사학자의 현대사 뒤집기 #“사유 능력 없는 탁상 가해자였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주장 비판 #2차 대전 후 독일 여성 성폭력 등 #기존 역사와 다른 불편한 진실

소설 『1984』를 써 감시가 일상화된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한 조지 오웰이 사실은 밀고자였다. 강릉원주대 사학과 이동기 교수의 새 책은 이런 도발적인 사례로 시작한다. 오웰이 누군가를 감시하는 끄나풀 역할을 자임했다는 얘기다. 감시 대상이 1949년 당시 소련 추종자 내지는 첩자로 의심할 만한 영국 내 좌파 지식인들이었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역시 개운치 않다. 목적이 정당하면 방법은 아무래도 괜찮나. 더군다나 밀고자가 오웰이었다니. 이 교수는 한 발 더 나간다. ‘오웰 리스트’에 국내에도 친숙한 역사철학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도 포함돼 있었다고 전한다. 카가 소련 예찬론자였다는 이유에서다. 이쯤 되면 헷갈린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책 제목 ‘현대사 몽타주’보다 작은 글씨체로 인쇄된 ‘발견과 전복의 역사’라는 부제가 책의 성격을 알리는 단서다. 최신의 연구 성과(발견)를 끌어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진실을 전하겠다는 거다(전복). 몽타주는 방법론.

책은 그런 의도에 충실한 사실들의 성채다. 주제에 따라 다섯 부로 나눈 다음 그에 맞는 역사적 사실들을 몽타주처럼 이어 붙였다. 그래서 결론 격인 5부를 제외한 중간 어떤 장(章)부터 읽어나가도 무방하다.

2부 첫 번째 장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유대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주장은 유명하다. 수백만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어 악의 화신쯤일 줄 알았던 아이히만을 그의 사형선고 법정에서 살펴보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는 얘기다. 나치 관료주의에 젖어 사유능력을 상실한 채 자신이 수행하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탁상 가해자’였을 뿐이라는 관찰이다.

68 학생운동은 유럽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다. 『현대사 몽타주』의 저자는 68 운동을 일회적 사건으로 볼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장기투쟁으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진 가운데 두 손을 맞댄 이는 68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사진 돌베개]

68 학생운동은 유럽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다. 『현대사 몽타주』의 저자는 68 운동을 일회적 사건으로 볼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장기투쟁으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진 가운데 두 손을 맞댄 이는 68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사진 돌베개]

이 교수는 묻혔던 사료와 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세워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거짓 진술을 했다고 밝힌다. 적극적인 가담자였고 권력 지향적이었다는 것이다. 페론 정권의 도움으로 도주한 아르헨티나에서 유대인들을 절멸시켰어야 했다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도 제시한다. 아렌트의 통찰은 극단적인 체제 순응형을 양산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능동적인 가해자로 타락해간 과격화 과정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아이히만들 사이에 자발적인 네트워크,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얘기다. 구조도 문제 삼아야 하지만 행위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같은 시각에서 ‘작은 나치들’, 부역자 수준의 하위 전범들도 단죄해야 한다고 본다. 이 교수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그런 정신이 반영돼 변화하는 독일 사법부의 최근 판결 사례들을 소개한다.

반대편으로도 달려간다. 이번엔 생명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탈출시킨 ‘쉰들러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흠 없는 영웅으로 보지는 말자고 제안한다. 인간은 그래 봐야 동물보다 약간 낫고 천사보다는 한참 못한 존재다. 그런데도 어떨 때는 이웃을 위해 목숨을 던진다. 그런 선의 평범성, 그 비밀에 다가설 때 비로소 공동체의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거다.

이 교수는 독일에서 분단 독일의 국가연합안에 대해 공부했다. 스스로 냉전사와 폭력사, 평화사가 주 관심사라고 밝힌다. 역사 해석의 전쟁터인 현대사를 ‘장기 폭력사’이자 ‘단속적 평화사’로 본다. 대체로 폭력적이었고 가끔씩 평화적이었다는 거다. 이런 시각에서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 45년 종전 직후 독일 여성들에 가해진 연합군의 야만스러운 성폭력, 68 학생운동의 한계와 의미, 브렉시트와 유럽의 위기 등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지향점은 기존 해석 뒤집기다. 영향력이 현재에 미치는 당대의 사안들인 만큼 흥미로울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5부 1장 ‘역사교육 무엇이 문제이고 어째서 중요한가’에서 이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이 기억투쟁이 아니라 지적 테러였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건국 기점을 언제로 잡아야 하느냐를 둘러싼 논쟁에서 진보 사학자들이 내세우는 1919년 건국 주장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나 망명정부 탄생을 건국으로 인정한 다른 나라 사례를 들어본 바 없다고 비판한다. 꽉 막힌 진보는 아닌 것이다.

결론은 어떤 사회에나 존재하기 마련인 갈등과 분쟁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고 해결하는 민주적 삶의 원리를 제대로 교육하자는 거다. 공리(公理)에 가까운 그런 제안을 진보든 보수든 반대할 이유는 없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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