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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12월의 얼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14호 35면

고선희 방송작가 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 서울예대 교수

한 해가 가고 있음을 요즘엔 SNS의 송년 모임 인증샷으로 체감한다. 내가 아는 이의 익숙한 얼굴과 그 사람과 함께인 낯선 얼굴들을 사진으로 만나는 기분은 좀 묘하다. 그 속에서 내가 아는 또 다른 이의 얼굴을 발견할 때면 우리가 이렇게들 엮여있구나 싶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

동기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앉은 모습은, 작전타임에 잠시 모여들어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스포츠팀의 모습과 닮아있는 구석이 있다. 감독의 다그침과는 별개로 선수들은 전쟁터 같은 코트를 잠시나마 벗어나 호흡을 고르고 지쳐있는 서로의 어깨를 감싸며 좀 더 힘내자 전의를 다진다. 지금보다 젊고 더 순수했던 학창시절의 친구나 입사 동기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이 되어주는 것 같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연구팀이 10년간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개인에게 행복감을 전염시켜주는 정도는 친구가 25%고 이웃이 34% 그리고 형제자매는 14% 정도로, 형제자매보다도 친구, 친구보다 이웃이 행복감을 전파하는 데 더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형제자매는 나와 다름없는 존재라 할 만큼 너무 가깝기 때문에 굳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친구만큼 좋은 관계도 없으며 행복도 전염된다고 하는 우리의 오랜 풍문이 사실로 밝혀졌다니, 이래저래 바쁘더라도 송년 친구 모임엔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삶의 향기 12/15

삶의 향기 12/15

SNS의 사진들을 봐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인 사진이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한 표정들이다. 모르는 사람의 얼굴인데도 그 사람의 마음이 그냥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끔 지인의 블로그에 올라온 단체 사진 속 낯선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는 순간도 있다. 물론 자기애가 넘치는 단독 사진들로 인스타그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젊은 세대의 당당한 모습도 보기 좋지만. 내가 아는 어떤 어른은 당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 얼굴이 더 크게 더 많이 나온 사진들을 주로 올려놓으신다. 그분은 예전에도 그런 분이었다. 어디 같이 놀러 갔다 와서도 우리는 대개 내가 잘 나온 사진을 골라 갖기 마련인데, 그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더 잘 나온 사진을 골라잡곤 하셨다. 내 얼굴은 늘 보는 거니까 좋은 친구, 귀한 후배님 얼굴이 더 잘 나온 사진을 갖는 게 당연하다는 거였다. 오늘 아침 블로그에 새롭게 올라온 사진에도 그분의 얼굴은 일부러 찾아야 할 정도로 작게 담겨있다. 순 우리말인 ‘얼굴’이란 말에는 그 사람의 ‘얼’이 들어있는 ‘굴’, 즉 마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영혼이 거기 담겨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던데... 자신보다는 남의 얼굴이 더 크게 잘 나온 사진이 좋다는 그분이야말로 어쩌면 더 귀한 영혼을 지닌 그런 얼굴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 시간이 많이 걸렸네. /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 나 이제 내가 되었네...’

미국의 시인 메이 사튼(May Sarton)의 ‘나 이제 내가 되었네’의 구절이 새롭게 다가온다. 한 해를 마감하느라 분주한 이 시점에 젊고 순수했던 시절의 동기와 옛 친구들 이름을 다시 부르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세월에 휩쓸려가더라도 이 사람들만은 꼭 챙기고 싶고, 그 친구들 얼굴에서 내 얼굴을 다시 찾아보고 싶어서일 거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이유 막론하고 쫓기는 연말 기분 탓인지 거리의 행인들 표정도 밝지 않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따뜻한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길 바라본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한동안 잊고 지내온 밝고 바른 삶에의 전의를 다시 다질 수 있길!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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