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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안긴 클린턴과 우정···퇴임후 더 빛난 '부시의 품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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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전 대통령(오른쪽)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2005년 2월 20일 쓰나미 피해를 입은 동남아 지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기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EPA=연합]

조지 H W 전 대통령(오른쪽)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2005년 2월 20일 쓰나미 피해를 입은 동남아 지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기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EPA=연합]

조지 H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9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냉전 시대를 끝내고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던 세기의 거물이 졌다. 그는 생존한 미국 전직 대통령 중 최고령으로,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구분해 ‘아버지 부시’로 불렸다.

오바마 "미국이 겸손한 종복을 잃었다"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30일 밤(현지시간) 가족의 대변인을 통해 트위터로 발표한 성명에서 “젭과 닐, 마빈, 도로와 나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놀라운 94년을 보낸 뒤 돌아가셨음을 슬픈 마음으로 발표한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이에 따르면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밤 10시께 텍사스주 휴스턴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 4월 부인인 바버라 여사가 92세로 별세한 뒤 급성 호흡기 질환 등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지 8개월 만이다. 아들 부시는 “조지 H W 부시는 아들 딸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이자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올해 건강 악화로 입원과 치료를 반복했던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왼쪽). 아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함께 있다[사진=트위터]

올해 건강 악화로 입원과 치료를 반복했던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왼쪽). 아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함께 있다[사진=트위터]

오랫동안 파킨슨병으로 투병해 온 그는 잘 걷지 못해 휠체어와 전동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왔다. 2014년 기관지염을 앓았을 때도, 2015년 크게 넘어져 골절 수술을 받았을 때도 잘 이겨냈으나 이번에는 죽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는 지난해 1월 20일 치러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건강 문제로 불참하며 “의사가 추운 날 밖에 앉아있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과 같다고 해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사과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 제41대(1989~93) 대통령을 지낸 그는 1924년 6월 1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밀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공직자를 지낸 집안이었다. 그는 예일대에 재학 중이던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항공모함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한다. 당시 18세. 해군 최연소 조종사였다. 4년 간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무공훈장 3개를 받았을 정도로 공을 세웠고, 이 경험은 이후 그가 정치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물 한 살에 바버라 피어스 여사와 결혼한 부시는 예일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사업가로 먼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1953년 텍사스 주에서 자파타 석유 회사와 자파타 원양 회사를 경영하며 엄청난 돈을 번 것이다.

[AP=연합뉴스]

[AP=연합뉴스]

사업가로 잘 나가던 그가 정계에 꿈을 품은 건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서였다.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낸 아버지 프레스컷 셀던 부시를 따라 정계에 입문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64년, 텍사스 주에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신다.

모든 사업을 접고 정치에 ‘올인’하기로 결심한 그는 65년 석유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66년 마침내 텍사스주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70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하지만 또 한 번 패배의 쓴 잔을 들이킨다. 그럼에도 그 실패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UN 주재 대사(1970~73), 국무성 베이징 연락사무소장(1973~75), 중앙정보국 CIA 국장(1977) 등을 지내며 다양한 경험으로 ‘외교의 달인’으로 부각받기 시작했다. 부시는 그 경험을 발판 삼아 80년부터 8년 간 로널드 레이건을 보좌하며 부통령으로 나라를 이끈다. 그리고 마침내 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를 누르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9년 2월 27일 한국 국회를 찾아 연설하고 있는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사진=국회기록물보존소]

1989년 2월 27일 한국 국회를 찾아 연설하고 있는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사진=국회기록물보존소]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9년은 세계 정세의 판도가 바뀌던 때였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소련이 무너지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구촌 리더십이 절실하던 시기였다. 부시는 소련 붕괴에도 불구하고 냉전 시대 시작됐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이끌어 결국 92년 러시아ㆍ우크라이나ㆍ카자흐스탄ㆍ벨라루스 4개 핵보유국이 협정이행을 위한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서 핵 군축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91년 주한미군 전술핵을 철수했다. 이는 한반도에서도 탈냉전을 시작을 이끌었다. 남북이 91년 12월 한반도를 비핵화한다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한 게 그 결과다. 이 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사실상의 종결자 선언이었다. ‘핵무기의 시험ㆍ생산ㆍ접수ㆍ보유ㆍ저장ㆍ대비ㆍ사용 금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핵재처리 및 농축시설 보유금지’, ‘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 ‘비핵화 검증을 위한 상호동시사찰’, ‘효력발생’ 등 6개항 속에 비핵화의 모든 것이 담겼다.

이미 이때 ‘핵 사찰’도 북한은 합의했다. 부시는 그래서 한반도 비핵화의 대원칙이 만들어지는 세계적 변환기를 이끈 지구촌의 리더였다. 91년 남북은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도 채택됐다.

부시의 또 다른 업적은 걸프전쟁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공격받은 쿠웨이트를 해방하기 위한 걸프전쟁에서 국제연합군을 조직해 압승을 거두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으로 역사에 기록된 걸프전에는 33개국에서 12만 명의 다국적군이 나섰다. 한국도 의료진 등을 파견하며 참여했다.

물론 그의 걸프전쟁 주도를 놓곤 미국식 패권주의를 보여준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91년 초 걸프전 종전을 전후해선 여론 지지율이 80%를 돌파하며 그의 재선 승리는 확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 불거진 경기 침체가 부시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했고 당시 클린턴 캠프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를 남겼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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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진가는 퇴임한 뒤 빛을 발했다. 당파 정치를 피하려 하면서다. 최소한 그를 패배시킨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그랬다. 2005년 부시와 클린턴 두 전직 대통령은 동남아 쓰나미 피해 복구를 위한 모금 활동에 함께 참여하며 퇴임 후 지도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함께 보여줬다.

당시 두 사람이 동남아 피해 지역을 찾았을 때 함께 타고 간 정부 제공 항공기엔 침대가 하나 뿐이었는데 클린턴이 침대 자리를 부시에게 양보했다는 사실이 미국 언론에 실리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인지 아들 부시 전 대통령도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해 공개 석상에서 거리낌없이 호감을 표시하며 훈훈한 관계를 과시하곤 했다.

부시의 별세를 놓고 미국에선 각계의 애도가 이어졌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가장 먼저 트위터로 “미국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라는 애국적이고 겸손한 종복(servant)을 잃었다. 오늘 우리 마음은 무겁지만 또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생각은 오늘 밤 부시의 전 가족과 함께 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흔들림 없는 리더십에 애도를 표한다”고 알렸다. NBC 뉴스는 부음 기사를 웹사이트에 올리면서 “미국을 세계의 유일 강국으로서 재확인시켰던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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