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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과이어 홈런공 34억 … 프로야구 원년 1호 승리공은 어디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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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호 22면

[이태일의 인사이드피치] 스포츠 가치 시장

‘이태일의 인사이드피치’를 새롭게 연재합니다. 인사이드피치는 2000년 6월 중앙일보에서 시작해 2007년 중앙SUNDAY로 옮긴 뒤 2009년까지 연재했던 이태일 전 중앙일보 기자의 코너입니다. 인사이드피치를 통해 스포츠에 담겨 있는 ‘나보다 우리’, ‘변칙보다 원칙’,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고유의 정신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0회말 이종도 끝내기 만루홈런 #공·배트·유니폼 아무도 안 챙겨 #당시 역사·정신 등 콘텐트에 무심 #동대문 야구장 벽돌도 흔적 없어 #MLB 맥과이어·소사 홈런 경쟁 후 #한국 ‘스포츠 가치 시장’ 개념 싹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의미 담아

마운드의 김광현(SK)이 살짝 웃는 것 같다. 뭔가 여유가 엿보인다. 확신을 가진 표정이다. 손끝을 떠난 그의 공이 홈플레이트에 이르러 잠시 멈춘 듯하다가 떨어진다. 박건우(두산)의 배트가 허공을 가른다. 헛스윙 삼진이다.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김광현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환하게 웃는다. 포수 허도환(SK) 역시 두 팔을 벌리고 마운드 쪽으로 향한다. 우승의 포옹을 위해서다.

단순한 야구공 아닌 땀·열정의 결정체

충남 공주에 있는 박찬호기념관. 생가를 리모델링해 건립한 기념관엔 박찬호의 각종 승리공과 글러브, 유니폼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박찬호기념관]

충남 공주에 있는 박찬호기념관. 생가를 리모델링해 건립한 기념관엔 박찬호의 각종 승리공과 글러브, 유니폼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박찬호기념관]

2018 한국시리즈 6차전, 프로야구의 마지막 장면이다. 연장 13회 5시간 7분의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그때, 마운드로 달려가는 허도환의 작은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박건우가 삼진을 당하며 자신의 미트 속에 들어온 공,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그 공’(우승기념공) 을 얌전히 꺼내서 유니폼 바지 뒷주머니에 담는 장면이다. 마치 다른 어떤 예상치 못한 순간이나 동작에도 안전하게 그 공을 간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그 공은 그저 하나의 프로야구 공인구가 아닐 것이다. 올 시즌 SK 선수단 모두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는 하나의 상징적 결정체일 것이다. 그 안에 프로야구 챔피언이라는 가치가 더해진, 역사에 남을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허도환은 그 공을 잘 보관하기 위해 주머니에 챙겼고,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그 공을 보며 올해 SK 선수단이 전해 준 감동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3월 27일 개막전에서 MBC 청룡 이종도가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리고 홈인하고 있다. [TV화면 캡처]

한국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3월 27일 개막전에서 MBC 청룡 이종도가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리고 홈인하고 있다. [TV화면 캡처]

1982년 3월 27일 그 역사적 개막전을 치른 한국프로야구는 그 날의 ‘승리공’이 없다.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MBC와 삼성이 치른 그 개막전이 연장 10회말 이종도의 끝내기 홈런으로 마무리되면서 그 공은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때는 요즘 같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구단이나 리그에서 그런 의미가 있는 공을 챙기지만, 그땐 그렇지 못했다. 36년 전 그날 MBC 선수로 출전한 유승안 경찰청 감독은 그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연장 10회까지 모든 이닝을 뛰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그날의 소장품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역시 그날 현장에 있었던 이상일(전 KBO 사무총장)씨는 “끝내기 만루홈런을 때린 이종도의 배트는 고사하고 그날 유니폼 한 벌 남겨 두지 않은 것이 우리의 아쉬운 현실이었다”고 개탄한다.

그 시절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얻는 가치는 승부의 결과를 위주로, 또는 전부로 생각했다. 그 과정이 주는 컨텐트로서의 가치나 스토리로서의 개념을 중요시하는 관점은 드물었다. 그래서 그 공을 찾지 않았고, 한때 성동원두라고 불렸던 야구의 성지 동대문구장을 철거하면서 그 벽돌 하나를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누가 이겼고, 기록이 무엇이냐가 중요했다. 스포츠의 가치를 논하는 그 지점에서 ‘어떻게’는 한 발 뒤로 밀렸다. 그 결과 MBC 청룡의 팬들은 자신들의 푸른 꿈이 사라진 것에 대한 위안을 어디서 받아야 할지 몰랐다. 성동원두를 가득 메웠던 야구팬들은 야구장이 있던 동대문 그 자리를 지날 때 ‘흘깃’하고 추억을 더듬는 데 머물러야 했다.

우리가 그렇게 그 공과 그 벽돌에 담긴 사연과 정신을 지나쳐 버리면서, 갖지 못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스포츠 가치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제적 개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마이클 센델(하버드대 교수)은 2012년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에서 프로스포츠 스타플레이어의 사인거래나 스카이박스, 구장 명명권 등 무형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고 거래하는 시장이 1980년대를 기점으로 활성화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프로 스포츠가 태동하던 시기다.

무형의 가치에 재물 자격 부여해 거래

성동원두라 불렸던 동대문구장(왼쪽 사진)과 철거 중인 모습. [중앙포토]

성동원두라 불렸던 동대문구장(왼쪽 사진)과 철거 중인 모습. [중앙포토]

‘스포츠 가치 시장’의 개념이 화제가 되고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98년 메이저리그 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의 홈런 신기록행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때 맥과이어의 시즌 70번째 홈런공은 경매시장에서 300만 달러(약 34억원)에 팔려 기념 공 거래의 정점을 찍었다. 그 열풍을 타고 한국프로야구에서도 이승엽의 홈런 행진 때 외야석에 잠자리채가 등장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 경기장에도 서로 기념품을 거래하는 전문 수집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의 진품들이 사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미리 준비해서 보존되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아직 그 개념에 대해 무감하거나 둔감하다. 일부 매니어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시장이 있지만, 서로 추억의 소장품을 교환하는 수준이다. 그 추억의 가치를 재화로 인정하는 개념은 미약하다. 이를 거래할 수 있는 관련 제도나 서비스가 제대로 없다. 프로스포츠의 산업 관점으로 보면 시장의 한 축을 개척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점은 우리가 스포츠를 통해 과정을 돌아보는 것보다 승부의 결과를 주목하는 데 익숙하고, 과거를 돌이켜 역사를 되새기는 데 인색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기억하는 습관’에서 성장과 발전이라는 가치를 얻는다. 지금의 한국 스포츠는 현재 결과 몰입의 관점에서 과정의 가치를 반영하는 정서로 변화가 필요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센델이 말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의미를 담아 무형의 가치를 인정해 재물의 자격을 부여하고, 다시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거래하고 시장을 이루는 것. 그렇게 우리가 스포츠를 경험하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종도의 배트가 불쏘시개로 사라지고 동대문구장의 벽돌이 먼지가 되는 일을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한·미·일 승리공 137개 전시 … 박찬호기념관 300억원 가치

11월 3일 충남 공주에 박찬호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과정을 기억하는 습관’이라는 관점과 스포츠 가치 시장의 개념에서 상징적이다. 박찬호는 어떤 선수 출신 스타보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현장에서 자신의 땀이 묻은 소품을 꼼꼼하게 챙겨 기념하고 보관해 왔다.

그렇게 그가 모은 소품들이 자신의 생가를 리모델링한 공간에 전시되었다. 그곳에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1승부터 124승까지의 모든 승리공(해당 경기에서 사용된, 공인을 받은 공)과 일본(오릭스), 한국(한화)에서의 승리공, 도미니카 윈터리그에서의 승리공 등 137개의 승리 기념구를 포함해 자신과 다른 메이저리그 스타의 글러브, 유니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기념관에 박찬호가 전시한 소품들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매니지먼트사 팀 61이 메이저리그 기념품 경매 전문가에게 의뢰해 추산한 가치는 무려 300억원이다. 기념관의 관리 운영을 맡고 있는 공주시(시장 김정섭)는 보안시스템 설치는 물론 개장 이튿날부터 상주 직원을 파견하는 등 보안에 철통을 기하고 있다. 박찬호는 자신이 소장한 메이저리그 관련 소품 가운데 70% 정도를 공주기념관에 보냈다고 한다. 그저 평범했던 야구공, 그저 특정 경기에서 입었던 유니폼이 수백, 수천 달러의 가치를 갖게 된 것은 센델이 지적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그 무형의 가치를 인정해 주면서 가능해졌다. 통산 100승, 올스타전에서 입은 유니폼 등이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 덕에 가치를 갖게 되고, 그 소품을 소장하고자 하는 구매자의 욕구가 시장에서 공감대를 이루며 가격이 형성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스포츠 가치 시장’이라는 경제적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이태일 전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를 거쳐 인터넷 네이버 스포츠실장을 지냈다. 프로야구 NC 다이노스 대표이사로 7년간 재직한 뒤 지금은 구단 고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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