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김명수 대법원 현기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시계추를 돌려 봅니다. 2004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우리법연구회 창립멤버인 박시환 변호사를 만납니다. “사법부에 변화가 필요합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이끌 후보군을 정리해 주십시오.” 박 변호사는 명단 외에도 법원 출신 개혁그룹의 의견서도 전달합니다. 거기에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과 같이 강한 보수성이 지배하는 사법부, 보수적인 대법관 일색으로 구성된 대법원이 그 상태대로 정치기구화하는 것은 극히 우려할 현상임. (…) 수구세력은 보수 일색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해 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으로 여기고 향후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이를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로 가져갈 가능성이 있음.”(『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보수’를 ‘진보’란 단어로 바꿔 봅니다. 과연 어색합니까.

2005년 출범한 이용훈 대법원 체제에서 박 변호사는 대법관이 됩니다. 진보 성향 대법관 4인과 함께 ‘독수리 5형제’로 불리며 진보 시대를 이끌다 2011년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때 남긴 말입니다. “최고법원을 구성하는 대법관은 반드시 다양한 가치와 입장을 대변하는 분들로 다양하게 구성돼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 법관을 통제하고 자기 편으로 길들이려는 요구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다시 진보 시대입니다. 김명수 대법원은 다양합니까. ‘법관을 통제하고 자기 편으로 길들이려는 요구’가 보수정권, 보수 성향의 대법원장 아래에서만 작동했습니까. 지금의 세 과시는 뭡니까.

법관의 양심은 개인의 양심과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신념·신조가 아니란 겁니다. 법관으로서 공정하고 편향되지 않는 판단을 할 직업적 양심 내지 법적 확신이라고 말입니다. 누군가는 “사회의식을 해독해 그로부터 제시된 척도에 따라 가치를 측정해야 하고 원칙적으로 자신의 척도로 측정해선 안 된다”(미국의 벤저민 카도조 전 연방대법관)고 했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에서 마이크(때론 칼자루)를 쥔 분들은 그러고 있습니까. 이미 ‘여당’인 분들이 자신만 옳다는 오만·독선·편협함에 사로잡혀 외부 권력을 사법부로 끌어들이고 있는 건 아닙니까. 이런 혼란이 새 질서를 낳을 거라고 믿습니까.

열정의, 확신의 세기가 개혁을 보장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한 반동을 낳곤 합니다. 이미 보지 않았습니까. 좌우 극한을 오가는 주기적 흥분 상태, 그게 원하는 바입니까.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