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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과기처 관료들 밤낮없이 뛰었다 … 미국, 한국과학원에 원조 600만 달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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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70년 8월 과학기술처 고위 공직자들과 한국과학원 설립 타당성 검토를 위해 파견된 미국국제개발처(USAID) 조사단이 한 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과기처의 조경목 진흥과장, 권원기 인력계획관, 김형기 연구조정관, 이응선 진흥국장. 앞줄 왼쪽부터 굿리치 USAID 국장, 도널드 베네딕트, 토머스 마틴, 프레데릭 터만 단장, 김기형 과기처 장관, 프랭클린 롱 박사, 그리고 정근모 박사. [사진 정근모 박사]

1970년 8월 과학기술처 고위 공직자들과 한국과학원 설립 타당성 검토를 위해 파견된 미국국제개발처(USAID) 조사단이 한 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과기처의 조경목 진흥과장, 권원기 인력계획관, 김형기 연구조정관, 이응선 진흥국장. 앞줄 왼쪽부터 굿리치 USAID 국장, 도널드 베네딕트, 토머스 마틴, 프레데릭 터만 단장, 김기형 과기처 장관, 프랭클린 롱 박사, 그리고 정근모 박사. [사진 정근모 박사]

1970년 대한민국에 과학기술 특수대학원 설립을 위한 지원 방안을 타진한 미국 국제교류처(USAID)는 원조 타당성 조사단 5인을 그해 7월과 8월에 나눠 순차적으로 파견했다. 8월 한국에 도착한 조사단 본진은 선발대가 작성한 중간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한 뒤 이를 승인하고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제출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86) #<38> 특수대학원 설립 급물살 #타당성 조사단 제출 중간보고서 #학과구성·교과과정·건물배치 촘촘 #과기처 공무원들도 불철주야 노력 #이를 본 해너 처장, 원조자금 증액 #KAIS, 한미 과학기술 협력 매개로 #

과학기술 특수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 설립 방안을 적극 지지하고 450만 달러의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전문가 지원, 실험실 설립 계획 마련, 주미 연락조정실 운영을 비롯한 실무 건의도 담았다. 내가 제안했던 학과 구성과 교과과정 내용, 그리고 학교 건물 배치 방안도 중간보고서에 포함됐다. 나는 조사단 간사로서 자료 조사와 보고서 작성을 맡았다. KAIS는 애초 경기도 수원 부근의 약 33만㎡(당시 표기로 100만 평) 부지에 자리 잡기로 했다. 학생 전원에게 기숙사를, 교수들에겐 주거단지를 제공하도록 제안했다. 하지만 부지는 최종적으론 대덕으로 변경됐다.

1973년 정근모 박사의 모습. [중앙포토]

1973년 정근모 박사의 모습. [중앙포토]

이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과기처의 엘리트 공무원들은 그야말로 밤낮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다. 김 장관의 지휘 아래 이재철 차관, 이응선 진흥국장, 권원기 인력개발관, 김형기 연구조정관, 조경목 진흥과장이 바로 그 주역들이다. 한국의 과학기술계는 이들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그 뒤로도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경제·교육을 위해 땀을 흘렸다. 이재철 차관(1923~99년)은 67~71년 과기처 초대 차관을 거쳐 71~76년 교통부 차관까지 지냈다. 그 뒤 76~81년 인하대부터 82~84년 국민대, 87~89년 중앙대까지 3개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이 차관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교토제국대에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 전선으로 파견되자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다고 한다. 해방 뒤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외교부에서 근무했으며 영남대·경북대 교수를 하다 다시 공직에 들어갔다.
이응선(1934년생) 진흥국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 출신으로 79~82년 2대 과학기술처 차관을 지냈다. 13·15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했다. 김형기(1936~95년) 연구조정관은 과기처 국제협력국장·기술협력국장을 거쳐 80년 27대 문교부 차관을 지냈다. 조경목(1937년생) 진흥과장은 경기고와 서울 공대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83~85년 제5대 과기처 차관으로 활동하고 12·13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권원기 인력개발관은 85~88년 제6대 과기처 차관으로 활약했다. 결과적으로 과학기술 정책을 담당하던 최고의 인재들이 KAIS 설립을 행정적으로 뒷받침한 셈이다.
USAID의 존 해너 처장은 중간보고서를 바탕으로 70년 9월 중순 박정희 대통령에게 애초보다 많은 600만 달러의 원조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KAIS는 이처럼 한미 과학기술 협력의 매개체가 됐다. 했다. 이제 조사단장 프레데릭 터만 박사가 주도하는 최종보고서만 남았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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