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무] 짤막한 동시 속에 너른 상상력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배꼽
신형건 지음, 남은미 그림, 푸른책들, 48쪽, 8800원

500원짜리 동전이 침대 밑에 굴러가 멈췄다. 손을 뻗어 꺼내려다 보니 물컹 만져지는 게 있다. 아이가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다. "아아악! 엄마, 쥐예요, 쥐가 나타났어요!" 엄마는 태연히 대답한다. "옛다, 이 게으름뱅이 녀석아! 네가 그 동안 뭉기적뭉기적 기른 쥐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 참 보기 좋구나!" 엄마가 내민 것은 먼지 뭉치. 아이들이란 어둡고 컴컴한 데서 뭔가 만져지면 즉시 쥐를 떠올리는, 엉뚱한 상상력을 가졌다. 그리고 시인이란 아이들의 호들갑에서 "엄마 손에 잡히지만 않았어도 넌 쥐가 될 수 있었는데 참 아깝다, 아까워!"라는 절묘한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침대 밑에 손을 넣었더니').

요즘 애들이 동시를 잘 안 읽는다고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하는 부모들에게 신형건 시인의 작품을 읽혀보라 권하고 싶다. 과거에 발표했던 24편을 빛깔 고운 삽화와 함께 다시 엮은 '배꼽'은 짤막한 싯구에 얼마나 너른 상상력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집이다. 24편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가운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 만한 작품은'엘리베이터가 고장났을 때'다. 시인은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자 계단으로 걸어내려가는 아이의 입을 빈다.

"이제, 9층이구나! 심호흡을 하는 순간/오래오래 빠져 있던/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듯 부르르-/누군가 진저리를 쳤어. 쭈뼛, 머리카락이/서고 식은 땀이 흘렀어/(…) 이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계단은/혹시, 쥐라기 공룡의 등뼈가 아닐까?/그 중에서도 몸집이 가장 크다는/디플로도쿠스가 캄캄하고도 캄캄한 잠을 오래/오오래 자고 있던 것일까?/이크! 그럼, 지금 내가 겁도 없이/그의 등을 밟고 있는 거 아냐/이러다 잠에서 깨어나겠네". 아파트 계단에서 이름도 발음하기 쉽지 않은 쥐라기 공룡의 등뼈를 끄집어내는 그 탁월한 능력은 시인이 아직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올해 초 출간된 시인의 또 다른 동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푸른책들)도 읽어볼 만하다.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