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무] 짜·장·면처럼 쫄깃쫄깃, 아이들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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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짜장면 불어요!
이현 글, 윤정주 그림, 창비, 228쪽, 8500원

단편의 참맛은 뭐니뭐니해도 단숨에 읽히는 데 있다. 단편을 읽으면서 책장 넘기는 가속도가 붙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단편'으로서 자격이 상당히 모자라다고 봐야 한다. 이현의 단편동화집 '짜장면 불어요!'는 오랫만에 만나는 단편다운 단편이다. 작가의 첫 동화집이라는데 믿기 힘들 정도로 책에 실린 다섯 편 모두 기량을 뽐낸다. 아이들의 아픔과 고민에 대한 관심어린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빠른 템포로 그들의 심리를 잡아낸다. 주제의 진지함과 접근의 가벼움. 한 그물에 옭아넣기 좀처럼 쉽지 않은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낸 수작들이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표제작 '짜장면 불어요!'는 박기삼이라는 '철가방'의 입을 빌어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열네살 소년 용태는 첫날 노랑머리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배달 고참 기삼을 만난다.

기삼은 언뜻 보기에는 불량스럽지만(배달 안할 때는 오토바이 폭주족이다) 사실은 이만한 프로도 없다.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즐기며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눠주는 비품이 아닌, 전용 철가방을 마련해 그 안에 자장면 27그릇을 넣고 다닐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수련중이다.

뿐만 아니라 자장면 탄생 100주년을 왜 기념하지 않는지 분개하는 등 자장면에 대한 상식과 관심도 대단하다. 용태가 '자장면(이게 표준어다)'라고 하자 기삼은 얼른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퉁을 놓는다. "불어터진 면발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식어빠진 쏘스(소스가 아니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짬뽕은 잠뽕이냐? 잠봉이냐? 짬봉이냐? 짬뽕은 짬뽕인데 왜 짜장면만 자장면이라는 거야? 짜, 장, 면! 혓바닥이 입천장에 짝짝 들러붙도록 감칠 맛 나게!"

작가의 문장력을 더 맛보려면 '봄날에도 흰곰은 춥다'를 읽어야 한다. 버스 운전을 하다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무능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딸이 훔쳐보는 마지막 대목이 절창이다. "봄이 왔는데도 추위에 몸을 떠는 흰곰 때문에 참방참방 눈물이 자꾸 고였다.(…) 눈물은 문지방의 경사면을 타고 흰곰을 향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흰곰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몸을 떨었다. 음주 운전을 한 날도 그랬던 거다. 한겨울에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야 하는 흰곰은 꽤 많이 추웠던 거다. (…) 흰곰 혼자 추워져서 소주를 마셨던 거다. 우워, 우워, 울고 싶어 소주를 마셨던 거다".

이밖에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소녀 3명의 우정이 가출 사건으로 무너져내리는 '3일간', 성에 눈뜨는 소년소녀의 사랑 이야기 '우리들의 움직이는 성', 우주여행을 통해 지구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지구는 잘 있지?'등이 실렸다. '짜장면 불어요!'는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하는 '제10회 좋은 어린이책' 창작부문 대상을 받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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