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소득주도 성장 수정 없다” … 새 경제팀의 상황 인식 불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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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책 수립의 첫 단추는 정확한 현실 판단이다. 진단을 잘못해서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새 경제팀의 현실 인식은 매우 우려스럽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는 그제 기자간담회에서 “경기 침체, 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수현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도 “소득주도 성장의 방향에 대해서는 전혀 수정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사방에서 울리는 경보와는 사뭇 다른 인식이다.

"위기 동의 않는다”는 홍남기 #"소득주도 성장 고수” 김수현 # 시장 신뢰 주기에 크게 미흡

지금 한국 경제는 고용·투자·생산·소비가 모두 얼어붙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8%에서 2.5%로 낮췄고, 내년(2.3%)은 더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자동차·조선·석유화학 같은 주력 산업은 활기를 잃었다. 최준영 기아자동차 대표가 지난 9일 전 직원에게 e메일을 보내 “우리의 생존을 걱정하고 협력사들의 자구 방안을 강구할 처지가 된 현실이 심히 안타깝다”라고 했을 정도다.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경제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위기 논쟁은 한가한 말장난”이라고 일갈했다. 그런데도 “침체·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한국 경제가 가라앉는 배경에 대한 판단도 그렇다. 구조적·대외적인 문제도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소득주도 성장을 1년 반 동안 밀어붙이며 경제를 더욱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는 게 대부분 주류 경제학자들의 평가다. 하지만 새 경제 라인은 거꾸로다. ‘역주행 정책’인 소득주도 성장을 고수하겠다고 한다. 홍 후보자는 “혁신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이 함께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김 정책실장은 “큰 틀의 방향에서 수정할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현 경제는 위기가 아니며, 소득주도 성장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고집하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판박이다. 홍 후보자는 고용 참사를 일으킨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도 “2020년까지 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지만, 대통령이 이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언급했으므로 이미 속도 조절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올해와 내년 2년 동안 29%가 오르는 것을 두고 “속도 조절이 됐다”는 데 누가 동의하겠는가. 이런 발언은 불신을 키울 뿐이다.

시장은 새 경제팀에게서 노동 유연화, 규제 개혁 등 경제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신호를 기대했다. 하지만 새 경제팀의 첫마디는 신뢰를 심지 못했다. 시장과 동떨어진 현실 인식, 그리고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원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제부총리가 원톱임을 김 실장이 분명히 했고, 홍 후보자와 김 실장 모두 “현장의 목소리를 열심히 듣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그 말대로 편견 없이 경제 주체들에게 귀 기울이기 바란다. 지금 시급한 것은 경제부총리가 리더십을 갖고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는 일이다. “근거 없는 위기론”이라느니, “소득주도 성장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만 한목소리로 되풀이할 때가 아니다. 경제팀을 바꾼 목적은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