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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혐오가 만들어낸 15㎝ 파이프 폭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체불명의 폭발물이 든 소포가 미 정가를 뒤흔들고 있다. 민주당 출신 전직 대통령의 자택을 노렸으니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다음달 6일 중간선거를 보름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어서 특히 그렇다.

민주당 출신 전직 대통령, 방송국 노려 #폭탄은 조잡하지만 실제 작동하는 수준 #트럼프가 혐오하고 비난한 인물에 배달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24일 오전 9시50분쯤(현지시간) CNN 뉴욕지국의 우편물 보관소에서 의심스러운 소포가 발견되면서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남서쪽 입구 인근의 타임워너 빌딩에 입주한 CNN 뉴욕지국에 신고받은 경찰이 출동했다. CNN 직원과 입주민을 대피시키면서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CNN 뉴욕지국에 폭발물 소포가 배달된 사실이 신고되자 출동한 경찰이 거리를 통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CNN 뉴욕지국에 폭발물 소포가 배달된 사실이 신고되자 출동한 경찰이 거리를 통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전직 대통령을 경호하는 비밀경호국(SS) 또한 이날 아침 일찍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워싱턴 자택에서 폭발물이 든 소포를 탐지해 차단했고, 전날 저녁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뉴욕시 교외 자택에서도 같은 종류의 소포가 발견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건은 연쇄폭탄 테러로 커졌다.

비밀경호국은 성명에서 “해당 소포들은 일상적인 우편물 검사 절차에서 폭발성 장치로 즉시 확인돼 적절하게 처리됐다”며 “경호대상자들은 소포를 받지 못했고 받을 위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틀전 민주당 기부자인 조지 소로스에게도 같은 종류의 소포가 배달됐고, 워싱턴과 플로리다의 민주당 유력인사 2명에게도 같은 소포가 배달되려다 실패한 사례까지 포함해 총 6건의 폭발물 소포가 드러났다.

연방수사국(FBI)은 즉각 수사에 돌입했다. 소포에 묻어있는 DNA 테스트와 화학물질 등을 통해 범인을 가려낼 계획이다. FBI 관계자는 “국제 테러가 아닌 국내 테러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배달된 소포가 모두 다소 조잡한 형태의 파이프 폭탄”이라고 밝혔다.

뉴욕 경찰의 반테러 책임자인 존 밀러는 모든 폭발물이 한 명 또는 복수의 동일한 용의자로부터 발송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CNN 뉴욕지국에 배달된 폭발물 소포. 총길이가 15cm에 달하는 파이프 폭탄이다. [AP=연합뉴스]

CNN 뉴욕지국에 배달된 폭발물 소포. 총길이가 15cm에 달하는 파이프 폭탄이다. [AP=연합뉴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폭발물은 노란색 봉투에 충격을 완화하는 공기방울 포장지로 쌓여있었다. 길이는 15㎝ 정도로, 파이프 안쪽에 폭발물질로 보이는 흰색 분말이 들어있었다. 검은색 테이프를 통해 전선 몇가닥이 붙어있었다.

노란색 봉투에는 우표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퍼스트 클라스 6장이 붙어, 범인이 정확한 가격을 우체국에 문의하면서 신분이 노출되는 상황을 피하려한 것으로 분석됐다. 폭탄 전문가들은 “가짜 폭탄가 아닌 실제 폭발가능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다행히 테러를 방지하는 일상적인 우편물 검사 절차에서 폭발물 소포 대부분이 가려지면서 인명을 포함한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중간선거가 임박한 때에 ‘반 트럼프’ 진영의 주요 인사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강도 높게 비판해온 언론을 향한 테러 협박 시도라는 점에서 선거에 변수로 작용할지 주목된다.

소포 수신자 모두 트럼프 대통령이 각종 유세에서 험담의 대상으로 오른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의 용의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이거나, 극우 백인우월주의자일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CNN에 배달된 폭발물 소포는 존 브레넌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수신자이다. 브레넌 전 국장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냈으며 트럼프 행정부는 평소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해온 브레넌 전 국장의 기밀취급권을 박탈한 바 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 브리핑에서 CNN 기자를 향해 “가짜뉴스”라고 외치며 CNN에 대한 반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22-24일(현지시간) 폭발물 소포가 배달된 6곳과 수신 인물들. [자료=뉴욕타임스]

22-24일(현지시간) 폭발물 소포가 배달된 6곳과 수신 인물들. [자료=뉴욕타임스]

6개의 소포 가운데 하나의 수신자인 민주당의 흑인 정치인 맥신 워터스(캘리포니아) 연방 하원의원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저격수’로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에 대해 “아이큐가 낮은 인물”이라고 놀렸다. 또 다른 한명인 에릭 홀더 주니어는 오바마 대통령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유일하게 정치인이 아닌 소로스의 경우는 그가 민주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인물이어서 극우세력의 타깃이 돼왔다. NYT는 “최근 중남미 이민자 행렬(캐러밴)에 대해 소로스가 자금을 댔다는 잘못된 소문이 있었다”며 이런 루머가 극우 세력을 자극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성명을 내고 “오바마 전 대통령, 클린턴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과 다른 공인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을 규탄한다”면서 이를 저지른 사람은 법의 최대 한도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 주지사는 “미국 사회가 지나치게 서로를 혐오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그 어떤 분열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깊은 상처를 남겨서는 안된다”고 화합을 강조했다.

뉴욕=심재우 특파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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