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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양양 산속 700m 지하 동굴서 '신의 흔적' 찾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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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초과학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다

“우주의 신비를 캐서 뿌릴 원천기술 씨앗은 150개”

기초과학연구원의 중이온가속기 #138억년 전 빅뱅의 순간에 접근 #꿈의 암 치료, 구겨지는 금속 개발 #일자리·먹거리 지도 바꿀 수 있어 #양양 지하동굴선 암흑물질 탐색 #1년에 한두 번 나타나는 신의 흔적 #존재 입증하면 일등 국가로 도약 #축적의 시간엔 반드시 보상 따라 #기다려 주고 지원하되 간섭 마라 #기초과학에 나눠 먹기는 안될 말

“핵(Nuclear)이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탈원전 정책은 잘못됐다. 첨단 기술은 모두 위험하다. 시속 300㎞로 운행하는 KTX 고속철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것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기술 아닌가. 100% 안전하냐고 물으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비행기를 타는 것은 이를 통해 가치 있는 일을 편리하고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 요소가 있지만, 원자력을 버리는 것은 국가적으로 어마어마한 손실이다.” (10월 20일 자 한국대학신문 인터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모든 가치 있는 문명은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위험을 통과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근원의 본향이거나 경이의 세계다. 그곳으로 여행 과정에서 인간은 희열과 전율을 느낀다.

문·사·철·수·물·화·생(문학·역사·철학·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은 문명 발전의 디딤돌이자 경이로운 여행의 길 안내자다. 문·사·철을 순수 인문학이라 하고, 수·물·화·생을 기초과학(basic science)이라 부른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되어 있다. 우리 몸도 핵으로 가득 찼다. 그 자체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핵은 물리학자(1911년 러더퍼더 박사 등)들이 자연을 이해하려다 발견했다. 핵의 성질을 기술적으로 응용한 것이 원자력(atomic power)이다. 정치적 결정으로 원자력이 흉기로 바뀐 게 원자폭탄이고, 평화적인 문명의 이기로 활용된 게 원전이다. 원전의 위험은 원자력 공학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됐다. 원전 사고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 소홀과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핵의 축복을 논할 차례다. 기초과학자들은 원자와 핵, 그보다 더 작은 초극미(超極微) 세계, 아예 보이지 않는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작은 세계일수록 답을 찾기가 어렵다. ‘신의 입자’처럼 살짝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곤 한다. 그래도 기초과학자들의 탐험은 계속될 것이다. 홍승우 성균관대 교수(물리학)는 "핵은 아직 불분명하다”고 말한다. 영어로 "Nuclear is still unclear”라고 했다. 알파벳 첫 두 글자 Nu를 un으로 바꾸니 핵의 세계가 불분명(unclear)에서 새롭게 분명한(new-clear) 세상으로 넘어가는 중간계임을 확연히 깨닫게 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경계를 파고들어 138억년 전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초극미 탐험자들의 목표다.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줄 대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건설 현장.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줄 대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건설 현장.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한국엔 우주 탄생의 신비를 탐색하기 위해 두 종류의 시설물이 건설 중이거나 작동하고 있다. 하나는 1조5000억원 예산이 들어가 2021년 완공 예정인 대전 유성구 신동리의 중이온가속기다. 다른 하나는 설악산 줄기 지하 동굴에 설치된 강원도 양양의 암흑물질 검출기다. 양양 보다 두 배나 깊은 또 다른 지하 동굴 실험실이 내년 말 정선의 한 광산에 생긴다.

빅뱅 이후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중 인간이 알고 있는 물질은 5% 미만이라고 한다(김영덕 기초과학연구원 소속 지하실험연구단장). 나머지 95% 이상은 미지의 영역. 그중 27% 정도가 오직 중력에 의해서만 존재가 인식되는 암흑물질이고, 68%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지만, 우주의 팽창 속도 측정에 의해 이론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암흑에너지, 이른바 반중력물질이다.

지하실험연구단 김영덕 단장은 빅뱅 초기에 생성된 암흑물질의 실체를 찾고 있다. 우주 탄생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될 첫 인류라는 점이 예순 살 학자를 소년처럼 흥분시킨다. 세계 속에서 한국 기초과학의 위상이 도약할 뿐 아니라 응용과학과 상업 기술에 미치는 파급 효과도 측량하기 어렵다.

김 단장은 암흑물질 후보군 중 하나인 윔프(WIMP) 입자 검출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윔프는 주변의 모든 잡음 신호(라듐 등이 내는 방사능)가 제거된 상태에서 요오드화 나트륨(Nal) 결정과 반응해 반짝 빛을 한번 내고 사라진다. 1년에 몇 번 나올까 말까 한 빛의 신호를 잡아채 데이터로 만들어 분석하는 인내의 싸움이다. 극도로 미세한 신호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방사선 등 모든 전자기파를 차단하는 게 성패의 관건이다. 고순도 요오드화 나트륨 검출기를 지구 상에서 가장 깊숙한 곳, 지하 깊숙이 숨겨 놔야 할 이유이다.

강원도 양양의 700m 지하 동굴에 있는 암흑물질 검출 실험실. [전영기 기자]

강원도 양양의 700m 지하 동굴에 있는 암흑물질 검출 실험실. [전영기 기자]

지난주 취재차 방문한 양양 지하 실험실은 산속 700m 수직 아래 파묻혀 있었다. 수평으로 1.8㎞를 승용차로 달리자 실험실 입구가 나타났다. 암갈색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두세 명이 겨우 걸어 들어갈 넓이다. 세상 곳곳에 무차별적으로 내려앉는 우주 방사선(cosmic radiation)을 1차로 차단하는 역할은 산속의 거대한 흙과 암석이 담당한다. 그래도 남아 있는 잡음 신호들은 특별하게 설계된 작은 격납방이 2차로 막아 낸다.

이 공간에 들어서니 빨간 불빛만 비추는 게 한밤중 해부학 실험실 같은 느낌이었다. 가로·세로·높이가 3m쯤 되는 육면체가 방을 꽉 채웠다. 양양 취재의 최종 목표인 ‘COSINE Detector’라고 불리는 암흑물질 검출 장비다. 미국에서 개발된 검출 시스템의 전체가격은 약 50억원. 이 장비 안에는 암흑물질만 오롯이 있게 하기 위해 맨 가에서부터 우주선 검출기→납→구리→액체 섬광체 순으로 된 차폐막들이 차례로 에워쌌고 한가운데 Nal 검출기가 놓여 있다고 동행한 김봉희 연구원이 설명했다. 연구단은 새로운 Nal 검출기를 자체기술로 개발할 예정이다.

김영덕 단장

김영덕 단장

김영덕 단장이 이끄는 지하실험연구단은 인원 65명에, 1년 예산 90억원 정도. 본부는 대전의 기초과학연구원(IBS·Institute for Basic Science·원장 김두철)에 있다. 그에게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를 신의 흔적을 찾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김 단장은 이렇게 답했다.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줄 대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조감도.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줄 대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조감도.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암흑물질은 현재 인류가 가진 가장 크고 근본적인 과학적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전 인류의 자연에 대한 지식에 혁신을 가져오는 일이다. 생명의 기원을 이해한다든가, 외계 생명체를 발견한다는 등과 비견되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이 해낸다면 한국의 과학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단번에 올려놓을 수 있다. 암흑물질을 찾는 경쟁에 미국·중국·독일·프랑스·일본·러시아·이탈리아 등 10개국 과학자들이 국운을 걸고 뛰고 있다.”

IBS는 지하실험연구단 말고도 ‘RNA연구단(단장 김빛내리)’ ‘유전체향상성연구단(명경재)’ ‘뇌과학이미징연구단(김성기)’ ‘나노입자연구단(현택환)’ ‘기후물리연구단(악셀 팀머만)’ 등 모두 28개 연구단이 한국 기초과학의 대표선수로 노벨 과학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시 138억년 전 빅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암흑물질 탐색이 우주 탄생 때부터 있던 물질이 지구에 나타나기를 지하동굴 속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방식이라면 ‘차세대 중이온가속기(RAON)’ 프로젝트는 빅뱅 후 지금까지 우주에서 생성된 물질을 인공적으로 구현해 원소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을 밝혀 보겠다는 능동적 접근법이다. 당연히 다른 실험실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과 초강력 에너지 발생 장치가 필요하다. 대형 국책사업, 빅 사이언스란 말은 그래서 붙었다.

홍승우 교수

홍승우 교수

대전의 작은 언덕 하나를 깎아 조성된 여의도 면적 8분의 1 정도의 부지에 수백m 길이의 직선형 가속기, 연구 시설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중이온가속기는 수소부터 우라늄까지 모든 원자를 이온화해 매우 빠르게 가속한 뒤 과녁 핵에 충돌시켜 지구에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동위원소들을 만들어 낸다. 이 동위원소들의 성질을 이해하여 별들의 탄생과 진화, 우주의 기원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중이온가속기 개념 설계 과제 책임자였던 홍승우 교수는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서 새로운 종을 발견하면서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밝혔듯 중이온가속기는 재현된 소우주에서 새로운 동위원소를 발견하면서 우주 원소의 기원과 진화를 탐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동필 명예교수

민동필 명예교수

중이온가속기가 만들어낼 희귀(稀貴) 동위원소와 원소 창조 과정에서 쌓이게 될 핵변환 지식으로부터 숱한 응용과학, 원천 기술이 파생되리란 전망이다. 기초과학연구원과 중이온가속기를 하나로 묶는 ‘국제과학비즈니스 도시’(2011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특별법’으로 입법화)를 구상했던 인물은 민동필 서울대 명예교수다. 당시 그는 "중이온가속기가 우주의 신비를 캐다가 뿌릴 새로운 과학기술의 씨앗이 150개쯤 된다”고 이명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대통령과 정권이 교체됐다 해서 기초과학의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닐 것이다. 인류의 삶을 이롭게 하면서 국부를 증진할 대표적인 원천 기술로 민 교수가 꼽은 건 세 가지. 첫째가 원전에서 나오는 고준위 핵폐기물의 반감기를 수십만 년에서 수백 년 수준으로 낮추는 기술이다. 둘째가 희귀 동위원소를 활용해 암세포를 추적·제거하는 기술이다. 셋째는 아이언맨 갑옷같이 가벼우면서 구겨질 수 있는 초강도 신물질의 개발이다. 원천 기술은 2차, 3차 파생 기술을 끝없이 창출해내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만 성공해도 대한민국의 먹거리, 일자리 지도가 바뀔 수 있다.

기초과학에 성공한 국가들의 3대 특징은 시간과 돈과 탤런트에 대한 아낌 없는 투자라고 한다. 그런 나라의 정부는 기다려 주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고급 두뇌들이 신나게 연구할만한 환경을 보장해 주었다. 축적의 시간 뒤엔 반드시 보상이 뒤따랐다. 부민강국(富民强國)은 그렇게 성취된다.

요즘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풀뿌리 기초과학’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만들어 기초과학계를 불안하게 하는 모양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좋은데 글쎄 풀뿌리 기초과학은 잘 모르겠다. 원자력 공학의 성취를 탈원전이란 미명 하에 태양광 비즈니스 업자들이 1/n로 나눠 갖는 광경을 보고 있는 터라, 풀뿌리 기초과학론이 지난 10년간 나름대로 잘 굴러가던 기초과학 집중 투자를 1/n로 나눠 먹기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과학자들에게 축적과 집중·몰입의 자유를 허락하라.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