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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인간 500세 프로젝트' 한국 기업이라면 감방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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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는 최근 인공지능(AI)과 원격의료를 결합한 안질환 모니터링 서비스를 개발했다. AI가 녹내장, 당뇨병성망막증, 노인성 황반변성증을 진단하고 환자를 지역 병원으로 안내한다. 이 질환은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시력 손상이나 실명으로 이어지는 만큼, 의료진과 전문 장비가 부족한 격오지나 야간 응급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게 딥마인드의 설명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서비스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와 직접 만나지 않는 진찰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CT)과 의료를 결합한 ‘디지털 헬스케어’는 4차산업 혁명의 핵심 산업으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IT기업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적극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세계적인 IT와 의료인력을 가진 한국에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신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까다로운 규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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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구글의 자회사 ‘칼리코’는 ‘인간 500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100만 명 이상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 노화의 비밀을 풀고 난치병 치료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를 추진한다면 유전자 연구를 제한하는 ‘생명윤리법’을 위반한다. 현재 한국에선 유전자 치료 임상 연구 대상 질환 범위는 암과 에이즈 등에 한정돼 있다.

애플은 개인의 의료기록을 병원으로부터 받아 관리할 수 있는 건강관리 애플리케이션(앱)을 공개했다. 의사가 처방한 약품 목록이나 콜레스테롤 수치 등 임상 데이터를 의료기관으로부터 직접 전송받아 아이폰에 저장하면 된다. 장기적으로는 이를 토대로 한 개인 의료정보 허브를 만들어 이를 의료기관ㆍ개발자 등에 공유하는 서비스를 내놓겠다는 게 애플의 계획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개인 정보를 당사자 동의 없이 처리하지 못하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사업에 제약이 있다.

최근 온라인 약국 ‘필팩’을 10억 달러에 인수한 아마존은 온라인 약품 배송 서비스에 진출하며 헬스케어 시장 진입의 신호탄을 쐈다. 한국에서는 모든 의약품의 온라인 판매가 불법이지만 미국에서는 두통약ㆍ해열제와 같은 간단한 상비약뿐 아니라 환자가 의사에게 처방 받은 조제약도 온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다. 중국의 알리바바도 자회사 ‘알리헬스’를 통해 처방약을 배달해주는 의약품 판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지능정보시스템학회장을 역임한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나라마다 산업의 발전 정도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규제를 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도 “다만 한국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나 사업에 대해 ‘일단 불법’으로 규정한다는 점이 신산업 발전을 막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한국 특유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IT나 헬스케어 분야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끔 규제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세계 주요 IT기업들이 헬스케어 사업에 나서는 것은 IT의 발전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세계 인구의 고령화, 만성질환 환자 증가 등으로 산업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전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 규모는 2015년 790억 달러에서 2020년 2060억 달러(23조20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상위 10대 IT 기업의 헬스케어 관련 투자는 2012년 2억8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11월 27억 달러로 10배 증가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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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들도 관련 기술을 독자 개발하거나, 대형 병원과의 협력을 통해 헬스케어 시장에 발을 들여놓긴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복잡한 규제 그물망 때문에 제대로 된 사업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한국 시장을 포기하고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카자흐스탄ㆍ방글라데시 등에 이미 원격의료시스템을 설치하고 국내 의료진과 협진에 나선 KT는 올해 연말까지 러시아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에 원격의료 시스템을 구축한다. SK텔레콤은 국내에 앞서 중국에 총 200곳의 병원ㆍ보건소 등 의료기관에 만성질환 관리 솔루션을 구축할 계획이다.

유전자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쓰리빌리언’은 미국, 원격진료 체온계를 개발한 ‘아람휴비스’는 중국에 먼저 진출하는 등 스타트업의 탈한국 흐름도 이어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한국에서 규제가 풀리기를 기다렸다가는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란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IT와 융합한 의료 기기를 출시하고도 기존에 없던 제품이라는 이유로 인증을 받지 못해 판매에 제약이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스타트업 ‘휴이노’는 3년 전 심전도 측정이 가능한 스마트워치를 개발했지만, 의료기기 승인을 받지 못해 국내 시판을 못 했다. 그러는 사이 애플은 스마트워치 최초로 심전도 측정 센서를 장착한 ‘애플워치4’를 내놓았다. 수동휠체어를 전동휠체어로 전환할 수 있는 전동 키트를 개발한 ‘토도웍스’,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용 점자 스마트워치를 개발한 ‘닷’, 영아 돌연사를 감지ㆍ예방하는 스마트기기를 개발한 ‘올비’ 등도 비슷한 예다. 모두 정부의 우수벤처 사례로 수차례 뽑힌 기업들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헬스케어 관련 규제를 풀겠다고 공언한 것도 이런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자는 취지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어 규제를 풀기가 쉽지 않지만, 미래 한국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승호 한양대 산업융합학부 교수는 “출시 시점이 제품의 성패를 가르는 경영환경에서 기업들이 기술 부족이 아닌, 규제나 인허가 과정 때문에 제품ㆍ서비스 출시에 제약을 받는다면 엄청난 역량 낭비가 아닐 수 없다”며 “양적으로는 충분히 커진 국내 산업이 이제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진국처럼 유연한 규제 환경을 갖춰야 할 때”라고 진단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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