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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의 어쩌다 투자]블록체인, 플랫폼을 넘어 서비스로

중앙일보

입력

#17년 전. 갑자기 정보통신부 차관 주재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광화문 KT 빌딩 꼭대기층 회의실로 달려갔다. 그 자리엔 야후ㆍ다음의 대표들도 와 있었다. 1시간 넘게 호통이 이어졌다.

UDC2018 결산…①블록체인, 이제는 서비스다(feat. 개발자)

‘요즘 무료 이메일 서비스가 무분별하게 제공된다. 그래서 청소년들도 쉽게 이메일 계정을 만든다. 청소년들이 쓰는 이메일 주소로 음란ㆍ도박ㆍ폭력ㆍ자살을 조장하는 메일까지 아무런 통제 없이 대량 수신되고 있다. 이메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포털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가.’

중간 휴식 시간. 모두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답변을 쏟아냈다.
‘첫째, 현행법상 이메일을 무단으로 열람할 수 없다. 법이 없어도 하면 안 된다. 둘째, 포털 사업자가 스팸 메일 대량 발송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피해를 보고 있다. 셋째, 스팸 메일 대량 발송으로 돈을 버는 업체를 알고 있다.’

질문이 집중됐다. 도대체 이런 나쁜 메일을 대량으로 발송하고 돈을 버는 업체가 어디인지를 밝히라고 추궁했다.
“우리가 회의하고 있는 이 건물의 주인인 KT입니다.”

당시 인터넷데이터센터(IDC)를 직접 운영했던 회사가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대량 스팸메일을 발송할 수 있었다. KT의 IDC 시장점유율은 55% 정도다. 갑자기 정회가 선언됐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회의가 끝났다. 청소년 보호대책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더니 그냥 끝났다.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난 1월 쓴 글을 각색했다. 그는 네이버의 창립자이자 NHN 한게임 대표를 지냈다. 그가 17년 전 기억을 소환해 낸 건, 당시 정부의 암호화폐 대책 때문이다. 김 대표는 “항상 새로운 기술에 의한 서비스가 나오고 부작용이 생기면 한국은 일단 중국식으로 생각하고 통제ㆍ조치하려는, 그리고 그렇게 하라는 움직임이 먼저 생깁니다. 유구한 관료제, 통제 사회 역사의 영향입니다.…저는 또 반복되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난해하고 우아한 사기?…‘인프라의 역전’ 일어날 것

선입견은 인간이 효율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다.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맞닥뜨려도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수많은 판단을 해야 하는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눈’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물과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선입견이 올바른 판단을 가로 막는다. 소위 ‘대가’라고 하는 이들이 신기술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 이유다.

송치형 두나무 의장. 2018,09,13. UDC2018. 출처: 업비트

송치형 두나무 의장. 2018,09,13. UDC2018. 출처: 업비트

”세계에 필요한 컴퓨터는 5대 정도다.”
1943년 IBM 회장이었던 토마스 J 왓슨이 한 말이다. IBM은 1911년 뉴욕에서 시계ㆍ저울 등을 만들던 회사 CTR에서 출발했다. 왓슨이 1924년 사명을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IBM)으로 바꿨다. 그는 사명에서 드러나듯 IBM이 ‘머신(기계)’을 만드는 회사라고 정의했다.

‘컴퓨터’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 대부분은 책상 위에 놓인 개인용 컴퓨터(PC)를 떠올리겠다. 하지만, 70여 년 전의 왓슨은 아니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데이터센터 등에 늘어선 커다란 기계를 떠올렸을 것이다. 왓슨이 보기에 그런 큰 기계를 회사마다 둘 필요는 없다.

21세기 가장 논쟁적인 신기술은 블록체인이다. 누구는 사회 체제까지 바꿀 수 있는 혁명적 기술이라고 하고, 누구는 역사상 가장 난해하고 우아한 사기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인터넷 이후의 인터넷이라고 하고, 누구는 단순한 신기루일 뿐이라고 한다.

현재 사회 여론의 주류는 후자다. 현실에서의 한계가 뚜렷하다. 현재 거래소에 상장된 코인만 2000개에 육박하지만, 유일하게 성공한 서비스는 비트코인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월드 컴퓨터’를 꿈꾼다는 이더리움은 초당 거래 처리 건수(TPS)가 20건에 불과하다.

사기 또한 횡행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세계 최초로 OO코인을 만들었다며 지금 투자하면 100배 넘는 수익이 가능하다고 유혹한다. 최근 논란이 됐던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호 관련 사기 사건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보물선 테마에 암호화폐라는 신기술 트렌드를 조합한 결과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련의 개발자로 상징되는 신기술 친화적인 그룹은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을 믿는다. 송치형 두나무 의장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는 『마스터링 비트코인』을 쓴 안드레아스 안톤노폴로스의 ‘인프라의 역전’이라는 개념을 빌어 가능성을 설파한다.

출처: ICO이그재미너

출처: ICO이그재미너

자동차가 처음 생겼을 때, 지금과 같은 제대로 된 도로는 없었다. 도로라고 해 봐야 말이 여러 마리 달릴 수 있는 길에 불과했다. 비라도 내리면 진흙투성이로 변했다. 그런 도로 위를 자동차가 달리다 보면 진창에 빠져 옴짝달싹 못했을 것이다. 말은 배고프다고 달리는 걸 멈추지 않지만,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서 버렸다. 사람들은 말이 있는데 자동차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비웃었을 것이다. 진흙투성이 도로는 말을 위한 인프라였다. 그런 인프라 위에서 자동차는 결함투성이였다.

그런데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깔리고 주유소가 늘어났다. 도로 위에서 자동차는 말을 훨씬 앞서 달렸다. 사륜구동ㆍ하이브리드 등의 기술이 나오면서 진창을 빠져나오거나 기름이 떨어지면 멈춰서는 등 초기 자동차 모델에 있었던 문제도 해결됐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은 중앙집권적이다. 기술ㆍ금융ㆍ공공 인프라가 모두 중앙화돼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스팔트 포장 도로, 곧 탈중앙화된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지금의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비난은 진흙 길에서 헤매는 초기 자동차에 대한 반응과 닮았다. 현재의 한계를 놓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성공한 서비스가 나와야 한다

인터넷의 기원은 1969년이다. 미국 국방성의 지원으로 미국의 4개 대학을 연결하기 위해 구축한 아프라네트(ARPANET)다. 처음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구축됐지만 프로토콜로 TCP/IP를 채택하면서 일반인을 위한 아르파네트와 군용의 MILNET으로 분리, 현재의 인터넷 환경의 기반을 갖췄다.

국내에서는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KORNET service)를 시작했다. 전화선을 이용한 접속 방식이라 데이터는 끊기기 일쑤였다. 이미지 파일은 엄두도 못 냈고, 실시간 채팅이 된다는 정도만으로도 흥분했다.

1998년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O양 비디오 사건’이 터졌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처음에는 형태가 ‘비디오’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파일을 디지털로 바꿔 인터넷에 퍼트렸다. 문제의 비디오를 보기 위해 공대생이 아닌 남자 대학생들도 컴퓨터 언어를 배우려고 전공서적을 들췄다. 주춤하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수는 급증세로 돌아섰다.

포르노 산업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대중들은 TCP/IP가 기술적으로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포르노 콘텐츠를 쉽게 유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터넷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네이버에서 뉴스를 보고, 구글에서 검색을 하며, 아마존에서 직구를 한다.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듣고, 위키피디아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인터넷을 통해 가능한 일의 범위는 상상을 벗어날 정도다.

블록체인 기술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목도한 우리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블록체인은 무엇인가’라고 정의 내리는 거였다. 분산원장의 원리는 무엇인지, 암호화는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논의했다. 개발자 그룹이 기술적 논쟁을 벌이는 사이, 대중들은 블록체인의 부산물인 암호화폐에 열광했다. 투자금의 몇 십 배, 몇 백 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인생역전’의 꿈을 좇아 투기판으로 전락한 거래소에 뛰어들었다.

ICO의 실체. 출처: 유튜브

ICO의 실체. 출처: 유튜브

‘사회적 병리현상’(이낙연 국무총리)이라는 진단까지 받은 블록체인 기술이 인정받으려면 성공한 서비스가 나와야 한다. 블록체인 업계의 구글과 아마존이 탄생해야 한다는 의미다. 백서 단계에서는 말의 뒷다리와 꼬리를 정밀화 같이 묘사한 그림을 약속해 놓고, 정작 서비스 단계에서는 어린 아이가 말 머리를 낙서한 듯 조악하게 그려낸 그림을 내놔서는 곤란하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블록체인 서비스가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송치형 의장은 지난 달 13일 제주에서 열린 ‘업비트 개발자 콘퍼런스(UDC) 2018’ 기조 연설에서 그 기간을 그리 길지 않은 2~3년으로 봤다. 크립토 업계의 한 달은 IT 업계의 1년이라고 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송 의장은 “스타크래프트의 부작용만을 생각하고 규제하던 분들만 계셨더라면, 그래서 멈췄더라면 지금의 게임 강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반도체 역시 무리한 투자라고 우려해 결정을 미뤘다면 지금의 반도체 리더인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성공한 서비스는 비평가ㆍ규제기관ㆍ투자자 등에서 나오지 않는다.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혁신가이자 발명가인 개발자를 통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이 글은 9월 13~14일 제주도에 열렸던 ‘업비트 개발자 콘퍼런스(UDC) 2018’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총 10개의 시리즈 글이 매일 업데이트 됩니다.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https://udc.upbit.com/2018’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업비트의 후원으로 제작됐습니다.
①블록체인, 이제는 서비스다(feat. 개발자)
②거래소, 도박장에서 블록체인 혁신의 심장으로
③성공한 플랫폼은 보이지 않는다: 확장성을 해결하라
④‘신뢰’의 블록체인을 지켜라: 보안과 보호
⑤쇼핑몰 뒤엔 카페24가 있다: Platform for DApp
⑥살아남는 DApp의 조건…블록체인 정신을 구현하라
⑦블록체인 경제 성장의 필수 요건, 스테이블 코인
⑧The rise of Tokenization
⑨DApp들이여, 루니버스에 올라타라
⑩블록체인의 고릴라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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