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곤의동물병원25시] 그들만의 세상, 나만의 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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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병원의 마지막 불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지는 순간 입원 철망 안에 있는 동물들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난다. 그러고는 잠긴 철망을 열고 모두 걸어 나온다. 입원실 문을 열고 나와 대기실의 소파에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기대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테이블에는 각자 좋아하는 간식들이 놓여 있다. 각기 선호하는 애견 잡지들을 읽으면서 수다를 떤다.

장기 위탁 중인 퍼그 쭈굴이가 눈 밑의 주름을 만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 박 원장은 왜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데? 내 주름살 제거 수술을 이렇게 엉망으로 해 놓다니…."

"요즈음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 보지 뭐. 신경 쓰지 마. 그러다가 금방 좋아지니까. 수술은 내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병원에서 제일 오래 생활하고 있는 푸들 명랑이의 대답이다.

"요즈음 새로 나온 이 닭고기 캔은 너무 맛난 거 같지 않아? 우리 밥줄 때 더 많이 넣어 주면 좋겠는데."

"넌 고기만 너무 먹어 병이 걸렸으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니?"

"그런데 저기 인큐베이터에 있는 꼬마는 많이 아픈가 보다. 하루 종일 시무룩하게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 걸 보니."

"쟤는 내가 보기엔 좀 힘들 것 같아. 동물 병원에서 오래 있으면 반은 수의사가 된다니깐."

이런 이야기들을 밤새도록 하다가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동물들은 어지러운 주변을 정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의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엎드려 늦은 잠을 청한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난 뒤의 병원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입원한 동물들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 있고 스태프들의 진료를 평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가끔 일하는 중에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그 녀석들의 눈길이 느껴질 때가 있다. 원망의 눈빛을 보이거나 때로는 슬픈 눈빛을 보이기도 하고 뭔가 간절히 요구하는 눈빛을 보이는 동물들도 있다. 나름대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그 눈빛들을 볼 때마다 죄지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저렇게 간절히 이야기를 하는데 왜 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내가 마음이 닫혀 있어서, 귀찮아서 그 이야기들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박대곤 수 동물병원장 (petclin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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