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유부남의 굴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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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웬 양복?"

몇 개 있지도 않은 넥타이를 다 꺼내어 이것 저것 매어보느라 부산을 떠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묻는다. 평소 양복을 거의 안 입는 사람이 토요일에 넥타이를 매겠다고 소란을 피우니 의아한 모양이다.

"오늘 결혼식 있어." "누구?"

"고 실장이라고… 이벤트 팀장으로 있다가 4년 전인가 웨딩 사업부로 옮긴 사람인데 우리 회사에 들어온 지 꽤 됐지. 8년차든가 아마. 넥타이 역시 회색이 낫겠지?"

양복 입을 때 나는 어떤 넥타이를 맬까 늘 고민하지만 매번 회색 넥타이를 선택한다. 아내가 묻는다. "여자야?"

순간 동료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김 팀장은 딴 여자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멋을 부리는 유부남이 되고 만다. 유부남이란 '아내가 있는 남자'란 말일 텐데 그 말은 곧 '딴 여자가 없어야 하는 남자'란 뜻이기도 하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유부남은 여자를 좋아하면 안 된다. 여자를 만날 때마다 유부남은 경계에 선다. 경계의 안쪽은 안전하지만 지루하고 바깥쪽은 흥미롭지만 위험하다. 나는 호기심 많은 겁쟁이다. 심장이 약하면서도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늘 다른 여자를 꿈꾼다. 아내를 무서워하면서도. 내가 일하는 곳은 결혼정보회사라서 직원의 90%가 여성이다. 물론 아내도 알고 있다. 그러나 유부남에게 세상의 모든 여성은 '딴 여자'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딴 여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딴 여자와 일을 하고 딴 여자와 점심을 먹는다.

예식장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방향이 같은 이 팀장의 차를 얻어 탄다. 차 안에서 이 팀장과 나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중간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다. 가방에서 꺼낸 휴대전화기를 여니 빨간색 부재중 전화가 이미 세 통이나 와 있다.

"어디야?"

"예식장 들렀다 집에 가는 길인데 평촌에 사는 팀장님이 태워 주셔서 차로 가고 있는 중이야. 얼마 안 걸릴 것 같아."

라디오에서는 조용필이 '그 겨울의 찻집'을 열창하고 있다.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이 팀장은 음악 볼륨을 줄인다.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몇 번이나 했는데."

"양복에 넣으면 불룩 튀어나오는 게 보기 싫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가방에 넣어두었더니 진동이 온 줄도 몰랐네." "여자야?"

순간 직장 동료의 차를 타고 가던 김 팀장은 토요일 오후 딴 여자와 단둘이 드라이브를 즐기는 유부남이 되고 만다.

"그, 그렇지, 뭐."

전화를 끊고 난 유부남은 어색하다.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한다. 옆 자리에 앉은 딴 여자도 어색한지 머리와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그 사이 천사가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더 이상 지나갈 천사가 없자 결국 딴 여자가 입을 연다.

"팀장님 아이들이 몇 학년이죠?" "고2와 중3입니다."

"둘 다 아드님인가요?" "네."

"사모님이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 그렇죠, 뭐."

이 팀장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양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는데 사모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와."

아내는 알고 있다. 나는 유부남이다.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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