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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요 없다'는 말에 영화 관계자가 보인 반응은?

중앙일보

입력

2018년 10월 5일, 제2회 한중시나리오 포럼이 부산영상산업센터에서 열렸다.

2018년 10월 5일, 제2회 한중시나리오 포럼 현장

2018년 10월 5일, 제2회 한중시나리오 포럼 현장

한중문화센터와 부산국제영화제가 주관한 이번 포럼에는 영화, 문화산업계에 종사하는 현직자와 중국 콘텐츠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이 대거 모였다. 성지혜 부국제 아시아영화프로그래머(중화권영화 선정담당)의 사회로 시작된 제2회 한중시나리오포럼. 이번 포럼에서는 어떤 청사진이 그려졌을까.

2018년 10월 5일, 제2회 한중시나리오 포럼 열려 #한중 영화 관계자들 모여 시나리오의 본질 탐색

"부산영화제가 중시하는 세션에 중국 영화가 모두 포진해 있다. 한중시나리오포럼의 개최 목적과 부국제가 추구하는 한중 합작은 그 괘를 함께 한다."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2018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엽문 외전 Master Z: The Ip Man Legacy'

2018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엽문 외전 Master Z: The Ip Man Legacy'

시나리오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잠깐 중국과 한국에서 '영화에 시나리오는 필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감독의 즉흥적인 연출로 만든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업계 종사자들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가 좋아야 좋은 연출이 가능하고, 좋은 배우가 작품에 참여한다."고 입을 모았다. 탄탄한 전개와 입체적인 캐릭터가 존재할 때 작품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

그간 실패의 쓴 맛만 봐 온 한중합작 콘텐츠들. 도대체 어떤 시나리오가 한중 양국에 통하는 '좋은 시나리오'일까.

1.제작 초기부터 작가, 감독, 배우, 마케팅, 배급이 함께 명확한 타겟을 설정한 후 만들어내는 시나리오

최평호 쏠레어파트너스 대표는 투자자의 관점에서 한중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투자자는 기본적으로 “왜 투자하나?”라는 관점으로 작품에 접근한다. 그러므로 타겟층에 대한 수요 조사가 더욱 명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한중 합작 사례를 보면 그런 부분들이 미흡했다. 작가, 감독, 제작자가 초기 단계에 중국의 관람등급, 검열 등 정책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에 돌입하는데 막상 중국(또는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타겟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도저도 아닌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 이렇게 되면 투자와 제작에 괴리가 생겨 원하는 성과를 낼 수 없다. 그러므로 투자자와 제작자 사이에 많은 경험 공유가 필요하다.

김병인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 역시 '한국 드라마는 먹히는 데 한국 영화가 고전하는 이유'를 타겟 설정의 미흡함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그는 "한국 드라마는 전 연령층을 타겟으로 스토리를 제작하는데 한국 영화는 성인용 영화가 주를 이룬다. 어른들만 이해하고 즐기는 스토리에 집중하면 소재가 한정된다. 전 연령층이 봐도 좋을 소재에 대한 발굴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최평호 쏠레어파트너스 대표

최평호 쏠레어파트너스 대표

2. 피할 수 없는 언어·문화 장벽, 작가들의 부단한 소통이 필요

제1회 시나리오포럼에서도 화두가 됐던 내용이다. '언어 장벽', '문화 장벽'에서 비롯되는 괴리다.

김병인 대표는 "미국 작가와 협업해 본 경험이 있다. 그와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나름대로 이해한 것 같았는데 정작 그 작가는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듯 현지화시켜버렸다. 결국 Scene by scene(각 씬 마다 검토하는 행위)으로 14시간 가까이 토론하고 대화한 뒤 재작업에 들어갔다. 통역의 한계를 넘어 작가끼리 충분히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철비>의 한 장면

<강철비>의 한 장면

우타오 완다픽쳐스 총경리는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모옌의 '붉은 수수밭'도 번역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 <황해>와 <강철비> 작품을 정말 재밌게 봤는데 아쉬운 지점이 하나씩 있었다. 바로 중국인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중국어 번역이 부자연스럽고 정확하지도 않았던 거다. 작가의 의도와 뉘앙스를 잘 전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왕하이린 중국영화문학학회 부회장은 "펑샤오강 감독은 대륙에서는 입지가 높으나 홍콩·대만에서는 그의 스타일이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니 한중 간 정서나 문화 격차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양안에서 흥행이었던 고전극 <무미랑전기>를 생각해보자. 당대의 아름다움을 충실히 재현하고, 풍성한 인물관계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3. 오리지널 시나리오 발굴을 위해서는 진짜 '통하는' 소재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 한다.

김병인 대표는 2년마다 '중국에서 흥행할 법한 시놉시스를 제출하라'는 미션을 작가들에게 던진다. 그리고 내부 기준에 따라 작품 5편을 선정하고 해당 작가가 중국 제작자 150명 앞에서 직접 소개하는 과정을 거치는, 일종의 실험(?)을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심사에 참여한 중국 제작자는 "한국이 시나리오를 잘 쓰는 건 알지만 제안한 소재들은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한 것. 중국어, 중국문화를 모르는 상태에서 중국향 시나리오를 썼을 때 한계가 있는 건 당연하다. 김 대표는 뼈대나 기본 구조는 한국 작가가, 살에 해당하는 부분은 중국 작가가 마무리 짓는 방식의 협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리우닝 완메이그룹 부총재

리우닝 완메이그룹 부총재

리우닝 완메이그룹 부총재는 또 다른 실험을 했다. 그는 "특정 소설 애독자들을 모아 Q&A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작품을 여러 번 읽게 된 이유에 대해 물어봤다. 애독자들은 인물의 어떤 지점이 매력적이었는지, 인물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깊이있게 답했다. 애독자로부터 한차례 검증의 과정을 거치니 새로운 관객층이 보였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김병인 대표와 모더레이터 이화정 씨네21 취재팀장, 왕하이린 부회장

왼쪽부터 김병인 대표와 모더레이터 이화정 씨네21 취재팀장, 왕하이린 부회장

4.시나리오에 진심이 담기면 관객도 느낀다

기술적으로 노련하지 않은 데도 성공하는 영화가 있다. 영화를 만든 작가와 연출가가 "난 이 메시지를 꼭 전달하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가 기반이 된 영화다. 간혹 기획 단계에서 업계 관계자들은 '흥행한 적 있는 원작', '티켓파워가 보장된 유명 배우(혹은 아이돌)'만 있으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유명 원작을 각색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에게 아무런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

작가가 전하고 싶은 주제가 명확하고, 그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목적의식과 열정을 기반으로 한 작품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왕하이런은 "중국에서 흥행한 <나는 약신이 아니다>를 비롯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태국, 인도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이와 상통하는 이야기"라고 전했다.

영화 <나는 약신이 아니다>의 한 장면

영화 <나는 약신이 아니다>의 한 장면

5. 본질에 집중한다.

할리우드의 슈퍼 히어로물이 처음부터 전세계 흥행 돌풍을 일으켰을까? 아니다. 캐릭터가 워낙 유명하니 여기에 상업 영화를 능수능란하게 찍어내는 감독을 연출로 고용했다가 실패한 사례도 많다. 김병인 대표는 "오히려 히어로가 갖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독립영화 감독에게 영화를 연출하게 해 돌파구를 찾더라"며 인류의 본질에 집중하고 그를 꿰뚫어 보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결론은 영화계에 좋은 시나리오 발굴이 절실하며, 한중 양국의 감독과 작가가 서로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꾸준히 공유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례와 현황을 논하기에 이번 시나리오 포럼은 짧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줬다고 생각한다.

노재헌 한중문화센터 원장(왼)과 시나리오공모전 시상식 현장

노재헌 한중문화센터 원장(왼)과 시나리오공모전 시상식 현장

이번 포럼에서는 2017년 제1회 한중시나리오포럼 이후 개최된 '한중시나리오 공모전'에 대한 시상도 이뤄지는 등 유의미한 성과들을 함께 축하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이번 한중시나리오 공모전에는 중국에서 700여 편의 시나리오, 한국에서 약 80여 편의 시나리오가 응모됐다. 행사를 주관한 노재헌 한중문화센터 원장은 "지난 해 어려운 상황에서 씨를 뿌려 놓았는데 시나리오 수상자를 배출해낼 수 있게 됐다"며 도움을 준 많은 사람에게 감사를 전했다.

심사를 진행한 성균관대 윤용아 교수는 수상작을 선정할 당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공모전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수 십 편의 시나리오를 보면서 한중이 함께한 역사가 오래됐고 그 안에서 이야기로 풀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생각했다."고 밝혔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시나리오 제작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제2회 한중시나리오포럼. '만약 10년 만 더 일찍 이 포럼이 시작됐다면 지금 한중 양국의 영화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벌써 내년에 출품될 작품들이 기대된다.

부산국제영화제=차이나랩 임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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