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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가객 장사익 “김치맛 같은 노래 드셔보세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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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노래 인생 25년 차에 접어든 장사익은 "내가 100으로 노래하면 관객도 100으로 들어주고 1로 하면 1로 듣는다"며 "공연도, 인생도 마치 거울 같다. 그게 쌓여서 자화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노래 인생 25년 차에 접어든 장사익은 "내가 100으로 노래하면 관객도 100으로 들어주고 1로 하면 1로 듣는다"며 "공연도, 인생도 마치 거울 같다. 그게 쌓여서 자화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란 무엇일까. 그것이 어딘가에 쓰여진 글귀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소리꾼 장사익(70)의 노래를 들어보길 추천한다. 글자가 운율을 만나 입밖으로 소리 내어지고, 구절마다 선율을 타고 오르내리는 움직임을 좇다 보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시가 곧 노래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흔다섯에 노래를 시작한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찔레꽃’(1995)부터 김춘수 시인의 ‘서풍부(西風賦)’의 구절을 따와 만든 8집 ‘꽃인 듯 눈물인 듯’(2014)까지 모두 시에 빚진 작품이다.

4년 만의 9집 앨범 ‘자화상 七’ #“삶의 쓴맛 단맛 짠맛 다 겪은 나이” #윤동주·기형도 등 시에 가락 붙여 #2년 전엔 성대 혹 제거수술도 #다음달 말 서울 등 전국투어 나서 #“한바탕 놀아볼까유, 웃고 울면서”

다음 달 4년 만에 나오는 9집 ‘자화상 七’은 보다 본격적인 시집에 가깝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라고 시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가만히 흥얼거리다 만든 앨범이다. 서울 홍지동 자택에서 만난 장사익은 “6학년(60대)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7학년(70대)이 딱 되니까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며 예의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막연히 구십까지는 노래하지 않겠나 생각했쥬. 근디 야구도 9회전이고, 축구도 90분 뛰잖어유. 심판이 막 5분 남았다고 재촉하고. 2회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항께 마음이 막 급해지면서 거울을 계속 보게 되더라구. 나는 대체 어떤 놈인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허나. ‘자화상’에서도 글잖아유. 한 사나이가 미워졌다가, 가엾어졌다가, 그리워지구. 결론은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한겨.”

하여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기형도의 ‘엄마 걱정’)부터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누구도 어쩔 수 없다/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허영자의 ‘감’) 등 마음속에 품고 있던 시들을 한 편씩 그러 모았다. 개중에는 매일 아침 신문을 보며 스크랩한 시들도 있었고, 그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팬들이 편지로 보내준 시들도 있었다.

서울 홍지동 자택 옥상에 서서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홍지동 자택 옥상에 서서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시 사랑은 유난해서 거실 기타 옆은 물론 화장실 창문에까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노래를 94년부터 했는데 그 한 해 전에 농악대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좌도 시 동인회 사람들한테 시집을 선물 받았어유.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나는 술잔에 떠 있는 한 개 섬이다’(신배승의 ‘섬’) 같은 시가 내 얘기 같구 입에 척척 붙었쥬. 아무리 좋은 가사도 입에 안 붙으면 못하잖유. 근데 시는 오래된 김치처럼 먹으면 먹을수록 더 다양한 맛이느껴지잖여. 단맛, 짠맛, 신맛, 쓴맛…. 짧지만 깊다고 해야 할지, 넓다고 해야 할지. 닫아놓으면 죽은 시인디 거기서 1, 2집이 거의 다 나와서 널리 불려졌으니 운명인 거쥬.”

어느 글귀 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찬찬히 읽는 습관이 몸에 밴 그는 한 팬이 고등학생 때 쓴 시라며 보내온 습작 ‘바보온달’에도 곡을 붙였다. 어떤 내용이냐고 묻자 바로 ‘여보~여보~낭군님~/난 당신을 그냥 두었어야 했어’ 하고 한 소절이 돌아왔다. “온달이가 지닌 것이 없어 미움도 걱정도 지니지 않았다는데 너무 재밌지 않어유. 고등학생 때 쓴 노래라는데 판소리처럼 북으로만 할거여. 암 것도 없이.” 그의 노래가 판소리와 민요, 트로트 사이 어드메쯤 위치한 것처럼 대화 역시 말과 노래의 경계 없이 흘러갔다. 그가 한 곡조 뽑을 때면 기가 막히게 바람이 불어와 마당의 풍경을 흔들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에서 열일곱에 상경해 보험회사부터 카센터까지 안 해 본 일 없이 열댓 개의 직장을 전전하다 느즈막히 노래를 시작한 그가 흔들린 적은 없었을까. 그는 2016년 초 성대에 혹이 생겨 제거 수술을 하고 회복할 때까지 한동안 노래하지 못하던 시절을 꼽았다. “첨엔 앞이 캄캄했쥬. 노래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건 생명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진데. 근데 거꾸로 생각하면 고쳐 쓰면 더 오래 쓸 수 있겠구나 싶던데유. 직로로 반듯한 길만 가 본 사람은 인생의 쓴맛을 모르잖여. 좀 돌아도 가보고 좌절도 해봐야 짠맛도 알고 단맛도 나오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래를 뽑아드는 덕에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가 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래를 뽑아드는 덕에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가 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흔히 즐거울 때 노래가 나온다 하지만 슬플 때 하는 게 진정한 노래”라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중하지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떠나보내는 것 역시 노래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란 믿음 탓이다. 스스로 ‘광대’이자 ‘굿쟁이’라 칭하는 그에게 유독 ‘하늘 가는 길’이나 ‘황혼길’ ‘귀천’ 같은 진혼곡이 많은 것도 같은 연유가 아닐까.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님은 먼 곳에’),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봄날은 간다’), 다 간다는 거여. 전부 레퀴엠이쥬.”

노래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오는 ‘노래 보시꾼’으로 유명한 그는 실제로도 장례식장을 자주 찾는다. 얼마 전에는 친한 벗의 출판기념회 겸 생전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시조도 쓰는 친구가 간암에 걸려서 얼마 못 살 것 같다 하더라고. 죽기 전에 화집을 하나 만든다길래 가서 노래했쥬. 그리고 보름 있다 저 세상으로 갔어요. 작년에도 남동생 떠나기 보름 전에 작은 음악회를 열었는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울더라고. 가기 전에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여.”

9집 발매에 맞춰 ‘자화상 七’ 전국투어가 다음 달 24~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대구·부산·광주·대전·고양 등으로 이어진다. “요새는 평소에 많이 안 울어서 그런가 노래 듣고 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어유. 한바탕 웃었음 또 울어야쥬. 명색이 ‘행복을 뿌리는 판’(그의 명함에 이렇게 적혀있다)인데. 놀 수 있을 때 제대로 놀아야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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