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식의 야구노트] 차우찬의 134구와 LG의 그림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2차전.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8회 피칭을 마치고 벤치로 돌아온 클레이턴 커쇼 옆으로 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고 한참 얘기했다.

로버츠 감독, 85개 던진 커쇼 설득해 교체 #비난 감수하고 다음 경기 대비하는 용기 보여줘 #LG, 두산전 전패 맊으려 차우찬은 134개 완투 #류중일 감독은 "미안하다...차우찬 자원했다"

커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지만 공을 던지진 않았다. 마무리 켄리 젠슨과 교체돼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커쇼에게 다저스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은 에이스에 대한 찬사였고, 1차전 선발을 류현진(7이닝 무실점)에게 양보한 뒤 2차전에서 멋진 피칭을 보여준 품격에 대한 감사였다.

지난 6일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승리한 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클레이튼 커쇼와 포옹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6일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승리한 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클레이튼 커쇼와 포옹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이닝을 더 던지면 커쇼는 완봉승을 거둘 수 있었다. 투구수가 85개밖에 되지 않았다. 심장 이상을 느꼈던 젠슨이 부상 이전처럼 믿음직스럽지도 않았다. 이때 로버츠 감독이 제동을 걸었다. 이런 경우 역전패를 당하면 감독이 모든 비난을 받게 된다. 로버츠 감독의 팀내 입지는 그리 탄탄하지 않다. 그러나 로버츠 감독은 다음 경기를 위해 커쇼의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커쇼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켰다. 다저스는 결국 3-0으로 이겼다.

같은 날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LG의 정규시즌 16차전. LG 선발 차우찬은 3-1로 앞선 9회에도 올랐다. 8회까지 투구수 104개를 기록했다. 차우찬의 변화구 회전력은 뚝 떨어졌고, 제구도 잘 되지 않았다. 2사 후 연속 볼넷으로 만루에 몰린 차우찬은 풀카운트 끝에 김재호를 삼진으로 잡고 완투승을 따냈다. 134구.

차우찬이 9회 공 30개를 던지는 동안 더그아웃에 있던 류중일 LG 감독은 마른 침만 삼켰다. 차우찬의 역투 덕분에 LG는 올 시즌 16경기 만에 처음으로 두산을 이겼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두산전 17연패를 끊은 것이다. 류 감독은 “많이 던지게 해서 미안하다. 차우찬이 끝까지 던지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류중일 LG 감독. [중앙포토]

류중일 LG 감독. [중앙포토]

이 경기와 상관없이 LG는 이미 포스트시즌 탈락이 사실상 확정됐다. 그럼에도 류 감독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하듯 무리수(선발투수의 투구수는 보통 100개 안팎)를 던졌다. 특정 팀, 그것도 ‘잠실 라이벌’이라는 두산에게 시즌 전패를 당하긴 싫었을 것이다.

류 감독과 구단 고위층에겐 정말 중요한 경기였다는 건 선수기용을 보면 알 수 있다. LG 팬들에게도 중요한 경기였다. 정말 중요한 승부라면 에이스가 134구를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 뒤 많은 LG 팬들이 분노했다.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된 상황에서, 지난 여름 고관절 부상으로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우찬을 그렇게 혹사해야 했냐는 것이다.

9회 불펜을 투입해 역전을 당했다고 해도 류 감독은 비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차우찬을 보호할 순 있었다. 류 감독이 경기 초반부터 차우찬에게 134개를 던지게 할 생각은 없었겠지만 위험 단계로 가는 상황을 막지 않은 책임은 있다.

LG에게 뼈아픈 건 이날 한 경기보다 이 경기까지 몰린 현 상황이다. LG는 6월 19일 단독 2위까지 올라갈 만큼 힘이 있었다. 외국인 투수 소사와 윌슨, 그리고 차우찬과 임찬규로 구성된 선발진이 탄탄했다. 4년 총액 115억원을 주고 영입한 김현수도 타선의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여름 들어 LG의 페이스가 뚝 떨어졌다. 윌슨과 소사의 투구수가 거의 모든 등판 경기에서 100개를 넘어 체력에 문제를 드러냈다. 불펜도 김지용과 정찬헌에게 부담이 집중됐다. 결국 김지용은 7월 말 이탈(팔꿈치 수술)했다. 부하가 커진 정찬헌도 점차 지쳐갔다.

LG는 양상문 감독(현 LG 단장) 시절부터 ‘리빌딩’을 주창했다. 2016년부터 베테랑들을 정리해 신진급에게 출전 기회를 줬다. LG 중심타자로 성장한 채은성 같은 경우도 있지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1군에서 뛴 선수가 더 많았다.

시즌 중반까지 LG의 상승세는 큰 돈을 들여 데려온 외국인 투수와 FA 선수가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난달 김현수가 부상으로 빠진 뒤 타선이 급격히 약해졌다. LG가 영입한 FA 선수들도 몇 년 후면 구조조정 대상이 될 텐데, 이들을 대체할 선수들이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악재가 쌓이는 와중 두산전 전패는 류 감독에게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류 감독은 지난 주 “차우찬에 이어 윌슨을 등판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기를 앞두고 윌슨이 “팔이 뻐근하다”며 등판이 어렵다고 말했다. 팔이 뻐근해서 못 던지겠다는데 의학적 근거를 요구할 순 없다. 결국 김대현과 임찬규 등 불펜진을 모두 준비하는 것으로 총력전을 시작했다.

결과는 아는 대로다. 류 감독은 차우찬 말곤 아무도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소사나 윌슨이 “아프지만 나도 던지겠다”고 나설 리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날 류 감독은 1승 말고 무엇을 얻었을까. 단지 그 1승이면 충분했던 걸까.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