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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으로 멋부리던 한국 남자들, 2002 월드컵 뒤 달라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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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호 24면

이도은의 트렌드 리더

복고풍 체크 롱 코트에 스트리트 무드를 대표하는 스니커즈와 패니팩을 짝지었다. [사진 솔리드 옴므]

복고풍 체크 롱 코트에 스트리트 무드를 대표하는 스니커즈와 패니팩을 짝지었다. [사진 솔리드 옴므]

“1980년대 중반만 해도 남성복에 패션이라는 게 존재했나 싶어요. 그저 다 똑같아서 유니폼 수준이고, 멋쟁이라도 양복 빼입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남성 패션 30년의 진화 #80년대 초 청재킷만 입어도 멋쟁이 #88올림픽 이후 코쿤 스타일 코트 #2002 월드컵 치르며 “나는 나” #몸 드러나는 슬림핏도 과감히 #요즘 오버사이즈·스트리트 대세 #한국, 글로벌 유행의 실험무대로

올해 30주년을 맞은 남성복 ‘솔리드 옴므’ 우영미(59) 대표의 회고는 과장이 아니다. 당시 신문 기사는 “캐주얼이 새로운 남성 패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1986년 4월 22일) “남성들이 기성복을 입는 시대로 접어들었다”(89년 10월 14일)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난 현재,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남성들은 패션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큰손’이 된 것이다. 대형쇼핑몰과 아웃렛에 남성 단독 편집숍이 등장했고, 루이비통·아크네·펜디 등 럭셔리 브랜드마다 남성 전용매장을 속속 열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도 한국은 유행의 실험 무대로 통한다.

솔리드 옴므는 이 격변을 그대로 지켜 본 브랜드다. 88년에 론칭했으니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컨템포러리’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당시, 기존 정장 신사복과 다른 감각적인 남성복을 선보였고 이제는 런던·파리 등에 진출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시시각각 유행을 반영한 브랜드의 역사는 고스란히 한국 남성복 30년의 변천사가 됐다. 15일 솔리드 옴므 30주년 기념 패션쇼 ‘솔리드 옴므 비욘드’를 앞두고 있는 우 대표를 만나 남성복 트렌드의 어제와 오늘을 들었다.

90년대 후반 들어 캐릭터 캐주얼 등장

1990년대 초 ‘솔리드 옴므’의 오버사이즈 재킷 스타일. [사진 솔리드 옴므]

1990년대 초 ‘솔리드 옴므’의 오버사이즈 재킷 스타일. [사진 솔리드 옴므]

“브랜드를 낼 때쯤 남성 패션은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80년대 초반만 해도 양복을 교복처럼 입었고, 학생들은 그저 군복을 염색해 입거나 청재킷만 입어도 멋쟁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88서울올림픽이 열리고, 해외에서 유학생들이 들어오면서 패션이라는 것에 싹이 트는 분위기였죠.”

소위 압구정동 ‘오렌지족 오빠들’이 오픈카를 타고 로데오 거리를 오가는 모습은 그때껏 보지 못한 패션을 선보였다. 올림픽 이후 해외 트렌드가 조금씩 유입되던 국내 시장에 ‘살아있는 길거리 모델’이었다.

솔리드 옴므가 나오자마자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런 틈새를 공략했기 때문이다. 아래·위 세트가 아니라 단품의 블레이저 재킷을 내놨고, 여성복처럼 어깨를 동그랗게 굴린 코쿤 스타일의 ‘소프트 코트’도 만들었다. 남성복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프린트 티셔츠를 제작했다. 정장이라도 단추가 두 개씩 달리는 더블 브레스트를 선보였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들이 기성복을 그대로 무대 의상으로 입고 나오던 때인데,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솔리드 옴므의 같은 옷을 4명이 입은 적도 있었죠.”

신승훈·이승철·윤상·조정현 등 남자 가수들이 지금의 아이돌처럼 팬덤을 갖추면서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하게 됐다. 지금처럼 협찬이 아니라 연예인이 직접 옷을 사 가던 때라 이들은 디자이너와 함께 자신이 입고 싶은 옷, 갖고 싶은 옷을 이야기하며 스타일의 영역을 넓히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솔리드 옴므의 우영미 대표. [신인섭 기자]

솔리드 옴므의 우영미 대표. [신인섭 기자]

90년대 중반 한양쇼핑(현 갤러리아) 등 백화점이 속속 문을 열면서 남성복의 플랫폼이 확실하게 구축된다. 볼 것도, 살 것도 많은 패션의 판이 생겼다는 의미다. 우 대표는 이를 “어설프지만 옷에 대한 도전이 활발했던 시절”이라고 기억했다. 어깨가 각지고 품이 넉넉한 오버사이즈 재킷과 코트류가 거리를 휩쓸었고, 양복 재킷 단추를 기존 2개에서 3개로 늘린 클래식 디자인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들어 새롭게 나온 패션 용어가 ‘캐릭터 캐주얼’이다. 정통 신사복보다는 편안해 보이고, 캐주얼이라고 하기엔 좀 더 격을 갖춘 스타일을 일컫는다. 97년 기준 솔리드옴므 외에도 이신우옴므·프랑소와즈옴므·에스까드릴·파시스 등 국내 브랜드가 속속 이 카테고리에 속했다. 우 대표는 “80년대 후반부터 패션 감각을 키워 온 남자들이 이쯤되자 골라 입는 실력을 갖춰가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때마침 루이비통·구찌 등 해외 브랜드가 하나둘씩 국내로 상륙했고, 대기업에서는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복장 규정을 새롭게 제시했다. 20대만이 아니라 구매력 있는 3040, 옷차림에 보수적인 대기업 회사원까지 패션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여기에 2002년 월드컵이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죠. 이 세대는 자신감이랄까 자기 확신이라는 집단 의식을 느꼈으니까요. 게다가 다양한 응원 복장을 했던 20대들은 패션이 자기 표현의 한 수단이 된다는 걸 확실히 경험했어요.”

한국이 신세대·기성세대 갭 가장 커

2003년 컬렉션에서는 짧은 외투와 몸에 붙는 바지로 90년대와 다른 실루엣을 선보였다. [사진 솔리드 옴므]

2003년 컬렉션에서는 짧은 외투와 몸에 붙는 바지로 90년대와 다른 실루엣을 선보였다. [사진 솔리드 옴므]

달라진 남성들은 2003년 디올 남성복 디자이너인 에디 슬리먼이 선보인 슬림핏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몸에 딱 붙는 바지와 재킷이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몸의 라인을 드러내다 보니 재킷 길이도 짧아졌어요. 재킷은 엉덩이를 덮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깨졌죠. 몸에 붙는 청바지에 이런 재킷을 짝짓는 차림이 한창 유행했죠.” 점퍼와 재킷의 중간 스타일로 허리길이에 오는 블루종 재킷이 처음 소개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젠 해외 바이어들이 서울에 오면 깜짝 놀라요. 지하철에서 만나는 2030 남자들이 어쩜 이렇게 멋지냐고요. 새로운 유행 아이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 한국이라고 하죠.”

그는 이를 ‘패션의 학습 효과’로 분석했다. 인터넷 강국답게 해외 컬렉션을 실시간으로 보고, 유명 브랜드의 신상품을 가장 먼저 찾아내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것. 국내외 스타들의 옷차림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소셜미디어에도 누구보다 빨리 반응한다. “컬렉션 의상이 뭔지, 한정판이 뭔지 죄다 꿰고 있죠. 남성 패션에서 한국은 신세대와 기성 세대의 갭이 가장 큰 나라일 거예요. 보통 50년이 걸려도 따라잡지 못할 진도를 속성으로 따라잡았죠.”

최근 남성복의 큰 흐름은 오버사이즈·스트리트 무드다. ‘시계추처럼 극과 극을 오가는’ 패션의 속성이다. 다만 과거 그대로는 아니다. 오버사이즈라도 어깨에만 힘을 주기보다 전체적으로 품을 키우면서 몸에 흐르는 듯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스트리트 무드는 이 복고 무드를 더 새롭게 바꿔준다. 롱 코트에 스니커즈를 짝짓고 패니팩을 허리에 두른다거나, 정장 코트에 터틀넥 니트를 덧입는 식이다. 이에 반해 신사복 정장은 “결혼식·장례식에만 입는 옷”이 될 정도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앞으로의 남성 패션은 어떻게 변할까. "이제는 유행을 나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죠. 그게 진짜 멋쟁이니까요.”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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