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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돈 출처 안묻겠다"…그 뒤 100만달러 돈주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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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중앙일보 창간 53주년 특집 - 평양·평양사람들 <4>

해외서 1000달러 식사로비 큰손 #김정은 “돈 출처 묻지 말라” 지시 #이자놀이 넘어 국영기업소 투자 #“대북 제재에도 장마당 건재한 건 #돈주들이 사재기 물량 풀기 때문”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북한에서도 신흥자본가가 등장하고 있다. 외화 뭉칫돈을 쥐고 있는 일종의 사채업자인 ‘돈주’다. 과거 단속을 피해 암암리에 ‘이자놀이’를 하거나,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판매하던 소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한 뒤 북한의 장마당 경제의 핵심 주체가 됐다. 돈주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놀이를 하는 단계를 넘어 국영기업소에 직접 투자해 이윤을 챙긴다. 중국산 제품,곡물을 들여와 장마당에 풀어 차익을 챙기기도 한다.

 지난달 12일 북한 주민이 평양의 마트에서 장을 본 뒤 계산대에서 현금을 세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12일 북한 주민이 평양의 마트에서 장을 본 뒤 계산대에서 현금을 세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말 탈북한 A씨는 “돈주들은 자금력을 동원해 다양하고 많은 양의 물품을 다루다보니 지역의 장마당 물가를 조절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며 “지방의 작은 기업소들은 원자재를 사들일 돈을 돈주들로부터 마련하기 위해 기업소 간부가 돈주를 접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최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장마당에서 쌀이나 기름의 가격이 널뛰지 않는 것도 돈주들이 사재기한 물량을 꾸준히 풀어 공급량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광복거리에서 영업중인 북한의 대형 마트.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광복거리에서 영업중인 북한의 대형 마트.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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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제재로 인해 장마당이 위축될 기미를 보이자 돈주들이 장마당에 외상으로 물건을 먼저 공급해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도 돈주라는 말이 있었지만 단속 때문에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았다”며 “최근에는 누가 돈주인지 알 정도로 씀씀이가 크고 공개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돈주가 이제는 북한 장마당을 끌고 나가는 ‘보이는 손’이 된 셈이다. 돈주들은 자가용을 굴리며 떵떵거리고 살 뿐만 아니라, 지방의 당 책임비서에 비견되는 권력자급으로 신분이 급상승했다는 게 탈북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북ㆍ중 국경 지방에 살다 입국한 탈북자 B씨는 “과거엔 5만 달러 정도의 현금을 보유하면 돈주로 취급받았다”며 “이제는 지방에서도 최소 100만 달러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돈주에 속할 정도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평양 광복거리에서 영업중인 북한의 대형 마트. 대형마트와 별개로 북한에는 각종 시장 460여개가 운영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시장에는 북한산 물품과 중국산 상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주로 돈주들이 대량으로 구매해 매대 상인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평양 광복거리에서 영업중인 북한의 대형 마트. 대형마트와 별개로 북한에는 각종 시장 460여개가 운영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시장에는 북한산 물품과 중국산 상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주로 돈주들이 대량으로 구매해 매대 상인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돈주들의 출발점은 대체로 외화벌이였다. 평양 인근 지역에서 살았다는 탈북자 C씨는 “장마당에선 벌어봐야 빠듯하다”며 “돈주들은 대부분 외화벌이를 통해 마련한 종잣돈으로 돈을 불린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무역회사 직원으로 해외에 파견됐던 친척이 있다는 그는 “일단 해외에 나가 2~3년 가량 일하고 오면 많은 현금(달러)을 쥐고 온다”며 “국가에서 할당한 액수를 납부하고도 절반 이상은 남긴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북한 당국이 300만 달러를 벌어서 바치라고 하면, 개인이 해당 국가내 인맥과 로비를 통해 500~600만 달러의 실적을 올린 뒤 300만 달러만 당국에 보고하는 식이다. C씨는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 위해 중국이나 러시아 식당에서 하룻저녁에 1000달러 이상짜리 식사를 하며 현지인들을 상대로 로비한다는 얘기는 무역일꾼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다른 탈북자 D씨는 “100명의 노동자를 이끌고 해외에 나간 책임자들은 인건비로 1인당 월 1000달러씩만 받아도 1년이면 120만달러를 손에 쥔다”며 “이중계약을 해 본국에는 인건비를 낮춰 보고하고는 1년에 30~40만 달러의 차액을 챙기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최근엔 각급 기업소들이 무역회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무역에 나서면서 ‘달러’를 만질 기회가 더 많아졌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오면 돈주로 신분이 변한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한 이후 “외화의 출처를 묻지 말고, 투자를 받고 활용하라”고 지시하면서 돈주들의 보폭은 더 넓어졌다고 한다. 기업소와 국영농장, 상점에 직접 투자한 뒤 현물을 받고, 이를 되팔아 이윤을 챙기거나 높은 이자를 받는 일종의 ‘제2금융권’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시장이 확대되면서 돈주들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며 “특권층-돈주-상인-주민으로 이어지는 자본 수급과 시장 구조가 국가공급체계를 대체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 특별취재팀=정용수·권유진·김지아 기자 nkys@joongang.co.kr
◆도움말 주신분=김보미·김일기·이상근·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사(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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