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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개선도, 10조 M&A도 … 9개월째 멈춰선 롯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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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신동빈. [연합뉴스]

신동빈. [연합뉴스]

신동빈(63) 롯데그룹 회장에 대한 법원의 2심 선고가 5일 나온다. 신 회장은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과 추징금 70억원의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롯데월드타워 면세점 특허권 관련 부정한 청탁을 하고 최순실씨의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였다. 1심 선고가 열린 2월 13일은 평창동계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였다. 신 회장은 당시 대한스키협회 회장으로서 세계스키협회 임원 10여 명과 선고일 다음날 저녁 약속을 잡아놨을 정도로 구속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고민 깊어지는 재계 5위 그룹 #신동빈 회장 5일 2심 선고 앞둬 #구속 뒤 투자 20%, 채용 80% 감소 #“글로벌 유통업계 경쟁 치열한데 #수세적 경영 머문다면 국가 손실”

2심 선고를 나흘 앞두고 롯데그룹은 잔뜩 숨죽인 채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지난 30일 “신 회장 구속을 상상도 못했던 만큼 대비책도 전무했다”며 “그만큼 경영공백이 커 2심 판단에 그룹의 촉각이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이 없는 8개월 남짓 동안 롯데는 다른 기업과 달리 연례적인 투자나 채용 면에서도 제대로 된 결정을 내놓지 못했다. 올 상반기 롯데의 유통부문 투자액은 8791억원에 그쳐 지난해보다 20%가 줄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 대한 2심 선고가 5일 이뤄진다. 정지 신호등이 켜진 교통 안내판 뒤로 서울 을지로에 있는 롯데백화점 본점이 보인다. [뉴시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 대한 2심 선고가 5일 이뤄진다. 정지 신호등이 켜진 교통 안내판 뒤로 서울 을지로에 있는 롯데백화점 본점이 보인다. [뉴시스]

반면 이 기간 30대 그룹의 전체 투자액은 45조6000억원으로 24% 증가했다. 매년 1만2000~1만3000명 수준이던 채용도 올해는 80% 이상 감소한 2300명 정도만 뽑았다. 또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미국 등에서 진행하던 10조원에 달하는 10여건의 투자나 인수합병 작업도 모두 멈췄다.

신 회장이 법정 구속된 직접적인 원인은 면세점 특허권이다. 호텔롯데는 2015년 7월 관세청의 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했다. 이후 국회 요구로 이뤄진 2016년 7월 감사원 감사 결과 호텔롯데는 다른 사업자에 비해 실제로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일부 점수가 부당하게 산정돼 탈락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 회장의 1심 유죄는 박근혜 정부의 2차 면세점 선정 과정과 얽혀 있다. 당시 정부는 2015년 12월 호텔롯데와 현대백화점 면세점, 신세계 DF, 탑시티 면세점 등 4곳을 추가 선정했다. 법원은 신 회장이 2016년 3월 박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70억원의 지원 요청을 받았고, 이 돈이 면세점 특허와 대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냈다고 판단했다. 반면 롯데 측은 “박 전 대통령과 독대 후 지원금을 낸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70억원은 뇌물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강요된 ‘준조세성 출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롯데 측은 “국내외에서 10여건 약 10조원 규모의 인수합병이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며 “당분간 투자나 채용 결정이 진척을 보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국내외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인수합병이나 투자도 제자리를 맴돌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 롯데는 동남아시아의 석유화학제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약 4조원을 투자해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유화단지를 짓겠다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현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또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3조원을 투자해 진행 중인 유화 콤플렉스 단지 조성작업도, 베트남에서 제과와 유통업체, 호텔 체인 등을 인수하는 작업도, 신 회장 구속 후부터는 실질적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롯데는 자산 규모가 100조원이 넘고 한 해 매출이 90조원이 넘는 재계 5위 그룹이다. 이 정도 규모의 그룹이 총수가 구속됐다고 경영 관련 주요 결정을 대부분 뒤로 미루는 건 비슷한 처지에 처했던 다른 그룹과 비교해서도 이례적이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 측은 “롯데는 신 회장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높았고, 일본 롯데와의 특수성도 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롯데는 신 회장이 정책본부장으로 경영 전면에 나선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덩치를 키웠다. 2004년 23조원이었던 롯데그룹의 매출은 2016년 92조원으로 성장했다(관리매출 기준). 신 회장은 그동안 롯데홈쇼핑·롯데하이마트·롯데렌탈을 잇따라 인수했고, 2015년에는 삼성의 화학계열사를 3조원에 인수하는 빅딜을 성공시켰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신 회장 주도로 그룹이 크게 성장하다 보니 회장이 없는 상황에서 큰 결정을 내리는 걸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신 회장의 구속으로 롯데의 당면 과제였던 지배구조 개선 문제도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고 있다. 롯데는 일본에서 그룹이 태동해 성장하다 보니 일본에 있는 롯데홀딩스가 국내의 롯데 계열사까지 지배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신 회장은 2015년 초 일본롯데의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와 ㈜롯데의 대표였던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을 해임하고 한·일 롯데의 ‘원(one) 리더’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7월 신동주 전 부회장이 부친 신격호 당시 총괄회장과 함께 신 회장을 이른바 ‘손가락 해임’하며 반격에 나서 한동안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재계 관계자는 “두 형제가 서로 자신을 부친이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면서 롯데의 후진적인 경영문화와 수만개에 달하는 순환·상호출자로 이뤄진 지배구조가 드러나고 검찰의 수사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할 당사자 역시 신 회장밖에 없다는 게 그룹 내 중론이다. 실제로 신 회장은 형제의 난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일 롯데의 경영권을 확립했고, 국내에서는 순환출자 해소와 지주회사 전환 등을 통해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호텔롯데를 상장해 국내 롯데의 모든 계열사를 지배하는 지주사를 설립함으로써 일본 롯데와의 연결고리를 끓는 것이 신 회장이 그간 추진한 ‘뉴 롯데’의 목표였다. 하지만 신 회장이 구속되면서 신 회장의 이런 뉴 롯데 구상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한국유통학회 회장인 박주영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은 엄청난 혁신을 통해 세계 유통업계를 새로운 경쟁 구도로 몰아넣고 있다”며 “국내 최대 유통기업 롯데가 수세적인 경영에 머문다면 결국 국가 경제의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cc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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