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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 자태에 절로 가는 눈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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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호 20면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87> 독일 바리고(BARIGO) 아날로그 온습도계

한낮의 최고 온도가 36도란 일기예보를 들었다. 날씨는 새벽부터 후텁지근했다. 김포공항을 뜬 비행기는 오전 10시도 되기 전에 간사이공항에 내렸다. 꼼꼼하고 더딘 일본의 입국 수속은 짜증스럽다. 대신 오사카로 가는 전철은 건물과 통로로 연결되어 빠르다. 가는 도중 펼쳐지는 풍경은 익숙했다. 돌아보아야 할 우메다 공중정원을 잽싸게 찾아냈다.

여유 있게 점심을 먹고 커피 마시며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나라와 일본 공공건축의 디테일 차이를 짚어봤다. 비슷해 보여도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격차의 공감이 오갔다. 친환경 도심공원과 조경의 마감은 설계자와 관련 전문가,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모은 집단지성의 선택이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한 공공 시설물들이 이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게 이상하지 않다. 느리게 진행되나 내용의 완결로 채워진 결실이다.

취향 저격하는 세련된 제안  

짬을 내서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취향과 경험을 판다는 츠타야 서점이다. 멋쟁이 사장 마스다 무네아키는 자신의 매장에 손님처럼 섞여 일한다고 했다. 우메다 지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될지 모른다. 막연한 기대조차 즐거워한 속내를 일행들은 모른다. 도쿄와 후쿠오카에 이어 오사카는 세 번째 츠타야 서점 탐방이 된다.

츠타야 서점에선 책만 팔지 않는다. 서가 사이 있을만한 위치에 폭신한 의자가 놓여있고, 건너편엔 커피 전문점이 있다. 책보다 책을 읽을 여유가 더 중요하다는 배려의 결정이다. 서가를 둘러싼 외곽엔 선별된 브랜드의 매장이 함께 있다. 음악 관련 서적 부근이라면 블루투스 스피커와 헤드폰을 취급하는 세련된 B&O이 물건을 판다. 음악의 관심을 듣고 싶은 기대와 연상으로 연결시켜 확장시키는 식이다.

상품의 구색을 갖추어 놓는 정도라면 서울의 서점이 못할 게 없다. 여기서 차이가 생긴다. 츠타야 서점만의 세련된 취향과 경험이 담긴 멋진 제안들이 더해진다. 넘치는 정보의 혼란 속에서 진정 좋은 물건들을 걸러내 선택의 도움이 되도록 한 거다. 책으로 비롯된 관심이 연관 분야로 이어지는 예를 들어준다고나 할까. 고객들의 호기심과 기대는 커지고 제안한 이의 취향과 경험은 절로 공유된다.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선 소통의 힘만큼 큰 게 없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믿음의 실천은 이제까지 없었다.

원형으로 설계된 서점의 동선이 흥미로웠다. 전체가 다 보이는 트인 공간이 펼쳐지는가 하면 다락방 같은 폐쇄공간도 있다. 매장 내부를 돌아다니면 마치 책으로 비롯된 상상이 유영하듯 연결되는 느낌이다. 조명의 밝기도 획일적이지 않다. 전면에 진열된 책들은 밝게 이면의 상품 매대는 어둑한 조명으로 분위기를 살렸다.

낯선 도시의 골목 같은 통로가 보여 끌려가듯 들어섰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용도를 잃어버린 만년필과 볼펜, 연필이 가득했다.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필기구로 채워진 공간은 강한 존재감으로 빛났다. 펜 길이만큼의 폭으로 기둥을 세우고 필기구로 가로지른 디스플레이가 멋졌다. 한두 개의 사물을 넘어 수백 수천 개가 모여 만들어내는 화려한 색채와 형태미가 남달랐다. 현대미술을 보는 듯한 오브제 행렬은 무려 20m 넘게 이어졌다. “멋지다!” “아름답다!”는 감탄이 이어졌다.

책상 위에서 정리하는 체감의 정도, 화이트 칼라를 유혹하다

필기구 행렬 사이사이 작은 진열대로 좌우 공간을 구획시킨다. 시선과 생각을 잠시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여기엔 필기구와 연관된 데스크 용품이 놓여있다. 어둑한 공간에 은은한 조명이 비춰져 보석 같이 빛나는 물건에 눈을 멈췄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처음엔 몰랐다. 투명 아크릴 돔 속에 눈금과 숫자가 적힌 금속 원통과 지침만 있는, 아날로그 온습도계였다. 정교한 만듦새와 황금빛 색채는 분명 유럽 어느 나라의 제품일 것이란 추측으로 이어졌다. 아름답고 독특한 존재감이 돋보이는 물건이다. 한눈에 반할 만했다. 자세히 들여다봤다. 독일의 ‘바리고(BARIGO)’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바리고 온습도계는 이미 내 작업실과 집에서 쓰고 있어 친근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과 정밀한 기계식 시계 같은 물건이 주는 믿음이 있다. 벽에 달아놓은 바리고 원형 온습도계는 17년째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장 나지 않고 건전지 갈아 끼울 일 없는 아날로그 기기의 매력 때문이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친근함으로 방안의 온도와 습도를 체크한다.

츠타야 서점의 선택에 놀랐다. 여기 진열된 모델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선한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온습도계가 왜 필기구 옆에 놓아졌을까’가 핵심이다. 이 물건은 책상 위에 두게 되는 기능성 장식물이었다. 맥락의 연결이 중요하다. 책상 위에서 하는 일이 무엇일까. 컴퓨터를 다루고, 필기구로 뭔가 쓰고, 아니면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거다. 화이트칼라 계층의 생산 도구는 모두 책상이란 테이블 위에 놓이는 게 자연스럽다.

온습도계의 역할은 불현듯 궁금해지는 실내 상태의 체크다. 약간 추운 듯한 현재의 온도는? 건조한 느낌이라 가습기를 틀어야 할 때인가? 등등. 체감의 정도를 정량화시켜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를 업무가 이루어지는 책상에서 확인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온습도계란 벽에 걸어놓고 사용하는 것이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용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을 예측하고 필요한 것을 연관지어주는 디테일에 감탄했다.

눈에 보이는 지침 부품 덕에 살아 움직이는 느낌

바리고의 탁상용 온습도계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느낌으로 아름답다. 온·습도 지침을 움직이는 부품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맨 위쪽에 드러나 있는 지침을 고정하는 프레임과 구동부의 코일은 언제라도 움직일 듯하다. 작동상태를 확인할 수 없는 디지털 기기의 건조하고 냉랭한 숫자 디스플레이보다 정감 있게 다가온다. 3단으로 분리된, 기압과 온도와 습도를 나타내는 금색 원통은 시각적 포만감으로 넉넉하다.

10m밖에 서 있는 여직원을 불렀다. 나긋하고 친절한 음성으로 바리고를 설명하는 표정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츠타야의 제안에 설득당한 나는 인터넷으로 사면 더 쌀지도 모르는 바리고를 덜컥 샀다. 기분이 좋았다. 상황과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다. 그 순간의 감흥과 필요가 자잘한 편리를 압도하는 쾌감은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왔다. 분주했지만 알찬 성과를 낸 일들이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다.

일반인을 위한 기상관측 도구 생산이 전문인 바리고다. 독일의 정밀공업 지대라 할 슈발츠발트에서 1926년 창업했다. 몇 년 전 프랑크푸르크 남부를 지나다 바리고 간판을 본 적 있다. 최근엔 집안뿐 아니라 요트나 산악 등반을 위한 아웃도어 용품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신제품이 많이 나왔다.

온도계·습도계·기압계·시계 같은 물건들은 얼마나 흔한가. 집집마다 이미 한 개 쯤 쓰고 있을 것이다. 매일 들여다보는 물건일수록 좋고 아름다워야 한다. 일상을 채우는 즐거움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바리고의 온습도계는 어쩌면 삶의 수치마저 재 줄지 모른다.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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