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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선한 북·미 비핵화 협상, 궤도에 올려놓을 마지막 기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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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호 29면

대북특사단 단장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이 지난 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북특사단 단장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이 지난 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양에 파견된 대통령 특사단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북관계 부분으로, 평양 남북정상회담 날짜와 남북연락사무소 개설 시기의  결정. 특사단은 예견된 성공을 거두었다. 둘째는 탈선한 북·미 비핵화 협상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는 중재역할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와 트럼프에 대한 신뢰 확인으로 이 미션은 완수했다. 그러나 특사단이 거둔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김정은에게서 비핵화 시한을 받아낸 것이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임기 내에 비핵화를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미국도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는 주문도 암시되어 있다. 김정은은 종신 집권하지만 트럼프의 임기는 길어야 8년(재선에 성공할 경우)이다. 그 8년의 절반 기간에 전임자들이 못한 북한 비핵화를 실현하고 북·미 간의 70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흔치 않은 위대한 업적이 된다.

정의용·서훈 대통령 특사단 방북 #김정은 비핵화 시한 밝혀 성과 #트럼프 “같이 해내자” 긍정 반응 #문 대통령, 내달 평양 정상회담 뒤 #뉴욕서 트럼프 만나는 절묘한 수순 #핵무기 목록 vs 종전선언 중재 주목

정의용·서훈 특사단이 6일 기자회견에서 밝히지 않은, 트럼프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특사단으로부터 김정은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트럼프가 깊은 인상을 받고, 김정은의 진정성을 믿고, 북한이 그렇게 갈망하고 한국이 원하는 종전선언의 결단을 내릴지 어떨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일단 “같이 해 내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정은은 북한이 비핵화의 초기 조치를 취할 만큼 취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말했다. “풍계리 핵실험장의 3분의 2를 파괴하여 다시는 사용하지 못한다.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도 마찬가지다.”

70년 적대관계 청산 단기간에 힘들어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 북한은 지금까지 물리적인 핵실험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풍계리 아닌 실험실에서 시뮬레이션 실험만 하면 되는 단계까지 왔다. 둘째, 풍계리건 동창리건 간에 북한이 말하는 폐쇄·파괴가 미국과 국제사회 전문가들의 입회·검증 없이 실시되어 폐쇄의 내용을 신뢰할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미국 내 비핵화 반대론자들, 회의론자들, 북한 붕괴론자들은 트럼프의 비핵화 협상전략에 조직적인 저항을 하고 있다. 반대론자들, 견제론자들 중에는 트럼프의 백악관과 정부 관료들도 포함된다는 것이 봅 우드워드의 신저 『공포(Fear)』와 뉴욕타임스 익명의 칼럼에서 폭로되고 있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에서 23석, 상원에서 2석만 의석을 늘리면 의회 권력은 민주당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의 대북 협상에 대한 미국 내 반대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이 실린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6·12 싱가포르의 열광(euphoria)은 어디로 가고 협상이 이렇게 꼬인 원인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근본적으로 일이 꼬였다기보다 꼬인 것처럼 보인다. 싱가포르 회담이 너무 극적이고 역사적이어서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수준이 비현실적으로 높았다. 70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과업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만큼이나 성급했다. 2017년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이 임박한 것처럼 보일 때와 비교하면 한반도 평화의 여정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다. 북핵, 한반도 문제, 북·미관계의 본질을 잊지 말고 긴 눈으로 협상의 진전을 지켜보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 김정은과 트럼프가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의 전체적인 개념도(槪念圖) 없이 성급하게 만났다. 북한을 다녀온 한국의 특사단이 김정은의 북·미정상회담 제안을 트럼프에게 전달한 것이 지난 3월이다. 트럼프는 참모들과 협의도 없이 즉석에서 정상회담을 수락했다. 그리고 3개월 뒤 김정은과 마주 앉았다. 3월에서 6월 사이에 트럼프가 상상도 하지 못한 돌발변수가 회담 분위기를 덮쳤다. 시진핑의 개입이다.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회담 앞뒤로 시진핑을 세 번이나 만났다. 트럼프는 중국이 대북 제재를 실질적으로 사보타지 한다고 의심하고 불평해 왔다. 김정은-시진핑 간 세 번의 회담은 트럼프의 의혹을 증폭시키고도 남았다.

싱가포르 회담, 쇼·악수 이상의 성과 거둬

지난 4일 청와대 관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는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지난 4일 청와대 관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는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사전에 충분한 준비 없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저돌적인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기둥을 세우면 벽이 무너지고 지붕을 얹으면 기둥이 내려앉아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레온 파네타는 지금의 상황을 보는 눈이 조금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다. 그는 9월 3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 정상회담에 앞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쇼, 악수, 말의 교환뿐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회담은 쇼와 악수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북한을 세 번이나 방문한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진행형의 성과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안보참모들을 매개로 북·미 간에 대화와 협상이 진행 중인 것도 과소평가할 일은 아니다. 북·미 협상은 장애물이 많은 거친 자갈길을 굴러가고 있다. 김정은이 특사단에게 말한 대로 새로운 북·미관계 설정의 의지가 강하고 트럼프의 북한 비핵화 실현의 의지 또한 확고하기 때문이다.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종전선언은 피해갈 수 없는 절차다. 북한은 종전선언이 정치적인 선언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북한에 종전선언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종식을 의미한다. 종전선언을 해야 다음 단계인 비핵화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으로 나아간다. 미국이 비핵화 후 종전선언을 고집하면 비핵화 협상은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산 아래로 굴러 내릴 것이다. 북한이 종전선언을 받아내려면 미국의 요구도 들어주어야 한다. 미국의 전문가들이 참관하고 검증하는 가운데 핵·미사일 시설을 폐쇄·파괴하는 것이다. 핵·미사일 목록은 더욱 중요하다. 검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북한 조기 조치의 첫 20%에 비핵화의 핵심이 들어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20%의 비핵화에 핵무기 생산의 핵심기술이 포함된다는 전제에서 한 말이다. 김정은이 진정으로 비핵화를 통한 북·미관계의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의 의지를 가졌다면 트럼프가 말한 20%가 포함된 핵무기 목록을 미국에 건네면서 동시적 행동으로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종전선언과 핵무기 목록의 교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어깨에 얹힌 무겁디 무거운 짐이다. 사실 그것은 문 대통령에게는 영광스러운 도전과제다. 정치인(politician)은 무사태평한 시기의 집권을 선호할지 몰라도 정치가(statesman)는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는 선장과 같은 도전에 자신 있게 맞설 줄 안다.  문 대통령은 6·25를 치른 이승만 대통령 이래 최대의 시련을 극복한 대통령이 될 것인가, 또 정치인이 될 것인가, 정치가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 섰다.

지금은 정상외교의 시대다. 청와대-평양 노동당 중앙당사, 청와대-백악관 사이에는 핫라인(hot line)이 설치되어 있다. 평양과 워싱턴을 언제든지 왕복할 수 있는 전용기가 24시간 대기상태에 있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 간에 소통이 모자라서 문제 해결이 안 되거나 늦어질 이유가 없다. 문 대통령에겐 두 번의 큰 기회가 있다. 9월 18~20일 평양 정상회담, 그리고 유엔 총회 참석하러 뉴욕에 가는 기회에 트럼프를 만나는 것이다.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고 바로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트럼프를 만나는 것은 절묘한 수순이다. 그렇게 보면 평양 정상회담은 더욱 중요하다. 판문점 도보다리 대화와 같은 분위기에서 김정은에게 미국이 받아들일 만한 비핵화의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설득할 것을 기대한다. 트럼프에게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취하는 최소한의 조기 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로 종전선언에 동의를 끌어내야 한다.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중재해야 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당분간 더 쓸 카드가 없다.

한국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우려

시진핑이 북한 9·9절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한국과 미국에게는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시진핑이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은과 나란히 서서 북한의 단·중·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최선 무기들의 퍼레이드를 사열한다면 트럼프의 김정은과 시진핑에 대한 불신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배후에 미·중 경제 전쟁에 대한 중국적인 계산이 깔려 있겠지만 시진핑의 사려 깊은 결단에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낙관은 이르다. 중국이 종전선언을 포함한 남북, 북·미 협상의 어느 단계에 개입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조기에 개입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중국의 이해를 무리하게 반영시키려고 하면 그건 한국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투키디데스 함정’의 피해자는 언제나 패권을 다투는 두 나라(미·중) 보다는 주변의 작은 나라(한국)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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