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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300마리 무게 돌 쌓았다, 전생에 미륵사 동자승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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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호 25면

[박정호의 사람풍경] 김현용 미륵사지 석탑 복원 현장팀장

탑에 들어간 돌의 무게가 총 1830t이다. 얼추 따져 보니 아프리카 수컷 코끼리(최대 6t) 300마리 분량이다. 기단(基壇) 폭 12.5m에 높이 14.5m. 한국 최고(最古) 최대의 탑으로 꼽히는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서탑)이다. 백제 30대 무왕 당시(639년) 창건된 미륵사의 얼굴이다. 그 석탑이 20년 동안의 수리기간을 거쳐 최근 제 모습을 찾았다. 올 문화재 동네의 빅 뉴스다. 지금은 가설 덧집에 갇혀 있지만 내년 3월께 일반에 완전 공개된다.

20년간 230억 투입 #연 인원 12만 명 참여한 최장 기록 #석조 문화재 수리 기술 한층 높아져 #스무 해 청춘 탑에 바쳐 #알바로 시작해 학예사까지 올라 #아내보다 탑이 꿈에 더 자주 나와 #1400년 버틴 ‘석탑의 맏형’ #탑 앞에선 항상 벌거벗은 느낌 #유한한 삶 생각하니 허무하기도 #석탑 수리는 내 운명 #불국사 석가탑 해체·조립에도 참여 #백제의 아비지·아사달 닮고 싶어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가 새로 태어난 미륵사지 석탑 앞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가 새로 태어난 미륵사지 석탑 앞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륵사지 석탑과 지난 시간을 함께해온 김현용(42·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현장팀장을 만났다. 탑이 주연이라면 그는 조연쯤 될까. 그는 여전히 바빠 보였다.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수리현장에 투입된 연 인원은 12만여 명, 전문가 그룹만 100여 명에 이른다. 김 학예사는 그중 유일하게 현장의 처음과 끝을 지켜왔다. ‘대체불가’라는 말마저 듣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스무 해 청춘을 탑에 바친 그의 감회도 각별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해체공사 직전의 미륵사지 석탑. 그 아래는 2009년 석탑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들. 현재 보물 제1991호로 지정됐다. [사진 문화재청]

해체공사 직전의 미륵사지 석탑. 그 아래는 2009년 석탑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들. 현재 보물 제1991호로 지정됐다. [사진 문화재청]

이제 대부분 마감한 것 아닌가.
“아니다. 5층 규모 덧집(가로 57.8m, 세로 30.7m, 높이 28.9m)을 철거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다. 탑에 손상이 생길지 항상 긴장된다. 편안하게 잠들 수 없다. 내년 6월까지 최종 보고서도 써야 한다. 그때쯤이면 한숨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평소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지금도 여전히 조심스럽다. 탑이 항상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다. 탑 앞에선 벌거벗은 느낌이다. 언행을 조심한다. 막상 종착역에 가까워지니 허무하기도 하다. 온몸의 기운이 쏙 빠져나가는 듯하다.”
허무하다니? 성취감이 대단할 텐데.
“조금 과장해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 지난 1400년을 버텨온 탑은 앞으로 1000년, 나아가 2000년을 더 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곧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보람도 크다. 한국 석탑의 맏형을 되살렸다는, 역사적 순간과 함께했다는 자부심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두렵고 두려웠다.”
탑의 조성 경위를 기록한 금세사리봉영기. [사진 문화재청]

탑의 조성 경위를 기록한 금세사리봉영기. [사진 문화재청]

뭐가 그리 무서웠나.
“한국 문화재 보존의 새 장을 열었다는 칭찬도 있지만 후세 사람은 달리 평가할 수 있다. 큰딸이 초등 5학년이다. ‘아빠, 왜 오래 걸렸어’ ‘대체 뭘 했는데’라고 물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밥값은 했는지, 세금은 낭비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최소한 역사의 죄인은 되지 않으려 했다.”
20년 동안 230억원이 들어갔다.
“단일 문화재 보수로는 최장 기간이다. 1915년 일제가 부은 콘크리트 더미를 벗겨내고, 석재 하나하나를 해체하고, 이를 다시 일일이 조립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공정별로 따지고 또 따졌다. 각계 전문가의 엄밀한 검증도 거쳤다. 덕분에 우리 석조문화재 수리 기술이 한층 높아졌다. 외국에서도 견학을 많이 온다.”
옛날 석재를 다시 많이 썼는데.
“해체 전 부재(部材) 사용률이 81%에 이른다. 새 돌을 많이 쓰면 21세기의 탑으로 비칠 수 있다. 탑 북쪽 면 석축(石築)을 포함해 총 2400개, 탑 몸체에 1627개, 탑 외부에 587개의 돌이 들어갔다. 그 많은 돌 중 똑 같은 게 하나도 없다. 크기·두께 모두 다르다. 풍화가 심하게 된 것은 새 돌을 써야 했다. 돌 하나하나 3D 실측하고, 상하좌우의 다른 돌과 맞춰보고, 전체 균형 여부를 살피고, 쌓았다가 불안하면 다시 내리고 등등, 쉽게 넘어간 게 하나도 없다. 새 탑 만드는 것보다 공력이 3배는 더 들어간 것 같다.”

타임머신 타고 백제 장인 만나고 싶었다

탑 양식이 독특하기 때문일까.
“목탑 양식의 석탑이다. 얇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와 압력에 취약한 구조다. 신라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과 비교하면 단박에 특징을 알아챌 수 있다. 이번에 돌과 돌 사이 틈을 메우는 무기질 재료와 옛날 돌과 새 돌을 연결하는 티타늄봉을 개발해 특허까지 받았다. 다른 석조문화재 복원에도 널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석가탑 수리에 도움이 됐고.
“2016년까지 5년에 걸쳐 해체·조립했다. 석가탑 북동쪽 상층 기단 덮개석에 균열이 생겼다. 석가탑은 그나마 부재가 64개에 그쳤다. 미륵사지 석탑 때 쓴 무기질 재료를 사용했다. 2년 전 가을 경주에서 일어난 진도 5.8의 지진에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올해 보수 결정이 난 구례 화엄사 사사자(四獅子) 3층석탑에도 그간 쌓은 노하우가 유용할 것으로 본다.”

김씨는 처음부터 탑 전문가는 아니었다. 2000년 11월 원광대 건축과 졸업을 앞두고 잠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미륵사지 석탑 수리가 천생의 운명처럼 굳어졌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석탑 모형 제작. 작업실 물청소도 막내인 그의 몫이었다. 이후 조사원·연구원·학예사를 거쳐 현장 지휘까지 올랐다.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잠을 자거나 언제나 탑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꿈에도 자주 나왔겠다.
“솔직히 아내보다 자주 나왔다. (웃음) 아내는 병이라고까지 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탑을 처음 세운 백제의 장인을 만나고 싶었다. 탑을 세운 전 과정을 물어보고 싶었다. 원형 보존 원칙에 따라 6층까지 다시 올렸지만 9층으로 추정되는 원래 모양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름 짐작되는 형태는 있다. 향후 더 연구해 박사논문으로 쓰려 한다.”

5층 덧집 수만 번 오르내려 관절통 앓아

각종 구슬을 담은 청동합. [사진 문화재청]

각종 구슬을 담은 청동합. [사진 문화재청]

일부에서 9층 복원을 주장했다.
“정확한 자료가 없다. 추정에 따른 복원은 진정성 논란을 부를 수 있다. 아마 그랬다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지 못했을 것이다. 6층 이상으로 쌓는다면 새 재료를 60~70%까지 써야 한다. 상부 하중 때문에 옛 돌이 지금처럼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중간에 도망치고 싶을 때는 없었나.
“2007년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시 전국적인 문화재 발굴 관련 비리 사건으로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오랜 시간 많은 돈을 쓰면서 성과가 적었다는 민원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작업이 전면 중단됐다. 결국 무혐의로 끝났지만 이런 수모까지 겪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컸다.”
섬세한 문양의 금동사리외호. [사진 문화재청]

섬세한 문양의 금동사리외호. [사진 문화재청]

2009년 탑 중심부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불탑에 안치된 공양물)가 쏟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금제 봉영기(逢迎記)가 나와 절의 조성연대가 정확히 확인됐다. 화려한 사리항아리와 갖은 형태의 구슬도 출토됐다. 올 6월 보물 제1991호로 지정됐다. 너무나 소중한 유산이지만 탑밖에 모르던 저로서는 해당 유물을 수습·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새롭다.”
대체 탑의 어떤 매력에 빠졌을까.
“2400여 돌 조각 가운데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게 거의 없다. 5층 덧집을 수천, 수만 번 오르내리며 관절통도 앓았다. 수리 난이도만 따지면 경주 석굴암에 버금갈 것이다. 아마 전생에 석탑과 관련해 큰 죄를 지은 모양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때론 업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좋게 보면 미륵사 동자승이나 불목하니가 아니었을까 싶다.”
석가탑을 쌓았다는 백제 석공 아비지, 황룡사 9층탑을 올렸다는 백제 기술자 아사달이 떠오른다.
“언감생심이다. 어디 가서 욕을 들을 말이다. 설화 속 인물이지만 그분들이 흘린 땀만은 닮고 싶다. 미륵사지 석탑 1층 네 면에는 탑 중심으로 들어가는 십자형 통로가 있다. 부처의 법력이 사방으로 뻗쳐가라는 뜻이다. 새로 쌓은 탑이 이 시대 힘든 이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옛 석공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1992년 복원한 9층 동탑은 천덕꾸러기일까

익산 미륵사지 동탑.

익산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를 찾은 지난 4일 유치원생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절터에 남은 당간(幢竿·사찰 행사 때 깃발을 걸어두는 장대)지주 주변에서 오순도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서탑 맞은편에 있는 9층 동탑(사진)이 꼬맹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동서남북에 네 문을 통해 탑 중심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서탑 모양을 따라 1992년 새로 세운 것이다. 내년 봄 서탑 덧집이 철거되면 두 탑이 온전히 마주보게 된다.

동탑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정확한 고증 없이, 새로운 재료로 1년 만에 쌓아 올린 흉물로 여겨졌다.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으면 좋겠다”는 말마저 나왔다. 김현용 학예사의 생각은 달랐다. 서탑을 수리하면서 동탑의 장단점을 고루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반면교사(反面敎師)인 셈이다.

“동탑도 많은 고민과 노력의 결과입니다. 지금 같은 보존기술이 없었지만요. 옛 석재가 많이 풍화돼 새 돌을 95%나 사용했지만 이 또한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합니다. 의외로 동탑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요. 불완전하나마 9층탑 형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탑을 없애고 다시 세우자는 의견도 있는데 크게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미륵사에는 원래 동탑과 석탑 사이에 목탑도 있었다. 동탑은 현재 정기 안전점검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구조적 이상은 보고되지 않았다. 동탑 조각 등 지난 세월 미륵사를 지켜온 석조물이 절터 곳곳에 전시돼 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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