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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아버지는 박헌영 비선···정체 안밝히고 수면 밑서 싸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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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요즘 이 책] 장편 『국수』 출간한 김성동

'작가의 요즘 이 책(작책)' 시즌 2, 세 번째 순서는 최근 다섯 권짜리 장편소설 『국수』를 출간한 작가 김성동(71)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40~50대 문학 독자에게 그의 이름 석 자는 아직도 강렬하다. 그의 1979년 장편 『만다라』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생기가 넘치는 생명력 긴 작품이다. 81년 임권택 감독, 안성기·전무송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을 만큼 인기를 끈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내놓은 『국수』는 풍성한 화제를 몰고 왔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여름 휴가 기간에 읽었다고 해서 관심을 끌었다. 대통령은 왜 『국수』를 선택해 읽었을까. 작책은 동영상 인터뷰다. 영상에 미처 못 담은 얘기는 온라인 기사로 전한다. '시즌 2'는 요리하는 소설가 천운영씨와 함께 진행한다. 천씨는 서울 연남동에서 스페인 식당 '돈키호테의 식탁'을 운영한다. '2018 작책'은 인터파크도서와 공동기획했다.

아버지가 '빨갱이'였다는 붉은 낙인. 출가. 파계. 환속.
 소설가 김성동의 인생을 규정짓는 굵직한 수식어들이다. 어떤 누구와 견줘도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해야겠지만, 참신함의 유통기한을 넘겨 딱딱해진 수식어들은 정작 김성동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절망의 크기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지금도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한반도의 모진 현대사 앞에 김성동의 사례가 그리 예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기막힌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식어의 표피 아래 김성동의 상처와 흉터는 생각보다 깊고 넓어 보였다. 세상천지 의지할 아무 곳 없는 무력한 개인이,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거친 세상의 파도에 맞설 때 나타나는 출분(出奔)과 귀환, 좌절과 새로운 출발이 김성동의 삶에는 점점이 박혀 있다. 현대사의 굴곡은 김성동에게는 개인사다. 몇 가지 현대사 키워드로 그의 삶을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을사늑약
김성동의 증조할아버지 김창균은 촉망받는 수재였다고 한다. 15살 때 충청남도 생진과 시험에 합격해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서 대과 준비를 하다 1894년 갑오왜란(김성동은 갑오경장은 일본식 표현이라고 했다)이 나자 낙담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과거 제도가 없어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곡기를 끊고 술로 시름을 달래다 달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성인 나이에 이른 증조할아버지의 자진하겠다는 결심을 당시 예법상 증조할아버지의 아버지·할아버지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김성동은 증조할아버지가 6살 때 쓴 기가 막힌 붓글씨가 남아 있다고 했다. "이 자식 웃기는 새끼여. 이런 거를 하고 자빠졌디야. 이게 말이나 되나 한 번 봐. 이게 글씨가 되나 못 되나." 집안 어르신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짐짓 예의를 차리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픈 마음을 비치며 '어린' 증조할아버지의 붓글씨를 내보이곤 했다고 한다. 그런 증조할아버지의 손자, 그러니까 김성동의 아버지 김봉한은 한국전쟁 와중에 국군 헌병대에 의해 총살된다. 좌익사범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제로 인해, 대를 걸러 그 손자는 동족의 가슴을 할퀴는 이념의 비극에 희생된 것이다.

#충남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현재 대전시 동구 낭월동 일대인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최악의 좌익사범 처형이 이뤄진 곳이다. 1950년 6월 말부터 국군이 대전에서 철수한 7월 20일 사이에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5000~8000명이 군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집단 사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가 우리를 죽인 것이다. 김성동의 아버지 김봉한은 1946년 조선공산당에 큰 타격을 입힌 위조지폐 사건인 조선정판사 사건에 연루돼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변을 당했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김성동의 83년 소설 '풍적'에는, 물론 상상력에 의한 것이지만, 아버지 김봉한의 최후가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소설 속 아들 영복의 아버지 김일봉의 죄명은 '사랑과 평화를 위한 임시 정신통제법 위반'. 사랑과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전시 국가에 의해 행해진 치명적인 사상통제쯤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무겁지 않게 꼬집은 작명이다. 죽은 일봉의 넋은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길을 이룬, 핏길이 이끄는 대로 고향 땅을 찾아간다. 김성동은 이런 식으로라도 상상을 통해서나마 아버지와 해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성동은 "나는 아버지부터 비공식"이라고 했다. 남로당의 대부 박헌영의 비선일 정도로 비중 있는 역할이었으나 정체를 드러내 '오픈'하고 싸울 경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수면 아래서 활약했다는 얘기였다.

#연좌제 혹은 비공식 탄압
그런 김성동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군대에 가도 장교가 될 수 없었으며, 당대의 최고 출세수단인 고등고시를 패스해도 임관의 길이 막혀 있었다. 삼불(三不)의 덫, 연좌제다. 김성동은 서라벌고 3학년 때인 65년 출가를 결행해 불교 승려가 된다. 76년 세속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는다. 졸업증명서나 '쯩' 없이 순전히 실력으로만 먹고 살 수 있는, 먹고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길이다.
 하지만 김성동은 쓰고자 하는 얘기를 마음껏 쓰지 못했던 듯하다. 소설 내용이 문제가 돼 신문이나 문예지 연재가 중단됐고, 문학상 심사에서 자기 작품이 배제됐다고 믿고 있다. 비공식 탄압이다. 연좌제와 관계없는 작가들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뜻하는 대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가 민주화 이후 보상을 받는데, 비극의 현대사로 인해 크나큰 고통을 받았던 연좌제 피해자가 자기 검열이나 비공식 탄압으로 인해 쓰고 싶은 얘기를 못 썼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김성동이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로워진 건 2010년 좌익 혁명가, 독립운동가 열전인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을 내면서다. 서른도 안 돼 숨진 아버지보다 곱절 이상을 산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에서다. "쥐꼬리만 하게나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깨알만 한 글자 크기의 "흐리마리한 영인본" 자료를 어렵사리 구해 "돋보기를 쓴 위에 확대경을 대고" 읽은 끝에, 박헌영·이현상·여운형 등 71명의 인생 역정을 대강이나마 복원해냈다.

 김성동은 『만다라』를 쓰게 된 것도 현대사를 직접 언급할 수 없다는, 근원적 공포감, 자기 검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했다. 『국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제 빠꾸된 건데, 오늘 이야기, 내 아버지 시대의 이야기, 우리나라 피어린 현대사를 이야기하다가 이것이 좌절되니까 오히려 저는 그 위로 갔죠.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과연 어떤 세상이었는가. 『국수』의 세계로. 그래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라고."
 『국수』도 결국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우회하는 방편이었다는 얘기다. 올라갔다 내려와서 무얼 하겠다는 거였을까. 김성동은 말한다.
 "오늘의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늘의 나.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왔나.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내 삶은."
지금의 나를 알기 위해 내 뿌리가 되는 과거를 찾아 나서는 모험은 진지하고 감동적인 문학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런 문학을 함께 읽는 일에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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