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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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몇 차례라도 와석종신을 하고 남았을 덤의 나이에 지금껏 꼿꼿하게 필묵을 어르며 만년의 예술혼을 꽃피우고 있는 석전옹이 작년의 모수 기념전에 이어 올해 다시 서울 호암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망백전」(9∼26일)을 연다고 해서 화제다.
『몸 따라 필력까지 쇠 한건 아닌지 몰라. 그저 썼으니 세상이 내보이는 것도 괜찮다 싶어 초대에 응했지.』
석전옹은 작년 모수 기념전 이후 쓴 글씨 80여점에다 60∼70년대의 구작들을 덧들여 모두 1백여점을 출품했다. 이중 70X190cm 크기를 18폭이나 이어 깨알같이 적벽부를 옮겨놓은 병풍글씨는 「망백전」을 빛낼 회심의 거작. 그는 이 적벽부가 자신의 필업을 결정지을 마지막 대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인다운 예감을 품고 연초이래 한자 한자에 피를 짜 넣는 처절한 열정으로 글씨를 써놨다.
붓대를 주먹 속에 가두고 글씨를 쓰는 「악필」로 유명한 석전의 독특한 집필법은 환력을 지낸 뒤 갑자기 찾아온 심한 수전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개발해낸 것이다. 근대의 서예 명인 중에는 입으로 글씨를 쓰는 구필, 왼손으로 쓰는 좌필, 발가락으로 쓰는 족필, 손가락으로 쓰는 지두필 등 기필이 더러 눈에 띄지만 악필의 운영자는 유일하게 석전 황옹 뿐이다.
1898년 전북 고창출생. 실학을 가학으로 잇는 만석지주의 집(영·정조대의 실학자 석재 황윤석은 그의 7대조가 된다)에서 태어난 그는 어쩌다가 외·처가까지도 만만찮은 재부를 지닌 집안으로 골라 만나 평생을 유유자적의 한사로 살 수 있었다.
그가 단순한 서예가라기보다는 『예·악·사·어·서·수 등 유자의 수신을 위한 「육례」를 고루 갖춘 마지막 선비』란 소리를 듣는 것도 이런 재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왕희지·조맹부·안진경 등 중국 역대 명필의 서체를 두루 섭렵, 오체가 다 능하면서도 특히 행·초서에 뛰어난 필력을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글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73년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전주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부터 였다.
그 후 거의 해를 거르는 법 없이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전시회를 열어오고 있다. 「마천십연」(10개의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남)의 노력을 일상의 경구로 삼고있는 그가 아니고는 이처럼 번다한 개인전을 메울 작품량이 나올 수 없다는게 서단의 중론이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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