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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음식점 권리금도 0원···자영업, 장사 접기도 힘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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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악 경기에 권리금까지 0 … 장사 접기도 힘든 자영업자 

건물주와 권리금 분쟁으로 유치권을 행사 중인 서울시내의 한 음식점. [김영주 기자]

건물주와 권리금 분쟁으로 유치권을 행사 중인 서울시내의 한 음식점. [김영주 기자]

서울 논현동에서 5년째 삼겹살집을 하는 자영업자 강모(61)씨. 올봄부터 매달 100여만원씩 적자가 쌓이고 있지만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는 심정으로 폐업을 미룬 게 6개월째다.

권리금 폭락 두 번 우는 소상공인 #강남·홍대역 등 핵심 상권도 흔들 #“새 임차인 못 구해 적자 나도 영업” #권리금 회수 기간 석달 연장 검토 #건물주가 나가라 하면 효과 없어 #“시장에만 내맡기면 약자만 피해”

강씨는 2일 “1억원을 냈던 권리금이 지금은 반쪽이 됐다”며 “권리금을 한 푼이라도 건지자는 생각에 적자가 쌓여도 장사를 못 그만둔다”고 말했다.

강씨는 5년 전 현재 40평짜리 1층 상가를 빌려 삼겹살집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논현동 상권이 좋아 권리금 1억원을 주저없이 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근처 김성수 부동산닥터 공인중개사는 “강씨 상가 권리금은 갈수록 하락 중이라 빨리 빠지는 게 상책”이라며 “새 임차인이 나서는 경우 자체가 없어 나도 갑갑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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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로 권리금이 폭락하며 적자에 허덕이는 자영업자 한숨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서울 강남역이나 신촌, 홍대역 같은 핵심 상권마저 권리금 포기 상가가 속출하고 있다. 경기가 급격히 꺾이면서 기존 자영업자는 가게 문을 닫으려 하지만 새로 장사할 사람은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권리금을 내고 상가를 빌린 자영업자로선 폐업에 따른 적자뿐 아니라 권리금까지 날려야 하는 이중고를 떠안게 된 셈이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전국 상가의 71%에 권리금이 존재한다. 권리 금액도 점포당 평균 4777만원이고 전국 상가 8.9%는 권리금이 1억원을 웃돈다. 서울의 경우 자영업 중 가장 많은 숙박이나 음식업의 경우 평균 권리금이 6000만원가량 된다. 이처럼 상가 임대차 시장에 권리금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법적 보호는 미흡하다. 그렇다 보니 피해는 늘 현재 장사 중인 자영업자의 몫이 된다.

‘나가라’는 건물주에게 맞서 ‘권리금을 보상하라’며 버티다 결국 폭력사태로 끝난 서촌 ‘궁중족발’ 음식점. [김영주 기자]

‘나가라’는 건물주에게 맞서 ‘권리금을 보상하라’며 버티다 결국 폭력사태로 끝난 서촌 ‘궁중족발’ 음식점. [김영주 기자]

서울 역삼동의 식당 주인 김모(56)씨가 그런 경우다. 김씨는 “개업 7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며 “권리금 3000만원에 인테리어 투자비 7000만원까지 한 푼도 못 건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장사는 안 되는데 인건비와 식재료비 같은 비용은 끊임없이 들어갔다. 임대차 계약이 많이 남아 있지만 문을 닫는 게 적자를 줄이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건물주와 협의해 보증금을 돌려받고 월세도 더는 내지 않게 됐다. 하지만 권리금과 인테리어비 등 1억원은 고스란히 날렸다. 김씨는 “1억원만 생각하면 잠도 안 온다”며 “권리금은 법으로도 보호가 안 되고 어디 가서 따질 곳도 없더라”며 안타까워했다.

염정오 상권분석사(공인중개사)는 “6월 중순부터 서울 주요 상권에 무권리금 조건으로 나오는 상가가 두드러지게 늘고 있다”며 “더 버텨봐야 적자만 계속 늘어날 것이란 판단에 권리금까지 포기하고 빠져나오려는 자영업자가 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최근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등으로 폐업 중인 자영업자들이 최후의 보루였던 권리금 회수마저 포기하고 ‘자영업 탈출 행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권리금은 임차인끼리 계약서 없이 주고받는 게 보통이다. 경기가 좋거나 보통 때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경기가 침체하고 요즘처럼 자영업자 폐업이 많을 때는 이미 권리금을 낸 강씨 같은 사람이 온전히 피해를 떠안는 구조다. 요즘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이 “폭탄 돌리기를 하다 하필이면 내 손에서 권리금 폭탄이 터졌다”고 하소연하는 이유다.

장사가 잘되는 상권이나 자영업자라고 권리금을 제대로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최근 서울의 뜨는 상권으로 꼽히는 서촌에서 봉평막국수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태림(46)씨는 권리금 때문에 건물주와 4년째 분쟁 중이다.

김씨는 2009년 남편 명의로 상가 임대차 계약을 했다가 2010년 다시 김씨 이름으로 재계약했다. 계약 만료 5년이 되기 한 달 전에 권리금을 내고 들어오겠다는 새로운 임차인을 구해 가게를 넘기려고 했지만 건물주가 이를 거부했다.

건물주는 이후 임대차보호법이 정한 계약갱신요구권 5년이 만료되자 곧바로 명도소송을 진행했다.

김씨는 “건물주가 직접 장사하겠다며 나보고는 빈손으로 나가라니 황당하다”며 “건물주는 전에 권리금을 내고 들어왔다는 증거를 대라는데 전 가게주인을 어디 가서 찾느냐”고 했다.

상가건물 임대차 관련 분쟁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권리금 관련이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상가 임대차 관련 분쟁조정 상담센터에는 매년 5000건가량의 상담이 몰렸지만 2015년부터는 1만 건 이상으로 두 배가량 늘었다. 이 중 절반 가까이가 권리금 관련 상담이다.

분쟁을 줄이기 위해 전문가들은 권리금 계약서 양성화를 대안 중 하나로 꼽는다. 권리금 계약서를 써놨다면 당장 김씨 같은 피해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상가정보연구소 등에 따르면 권리금이 붙어 거래되는 전국 상가 중 권리금 계약서를 작성하는 곳은 채 20%가 안 된다. 권리금 계약서를 양성화하기 위해 법적·제도적인 뒷받침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채윤 법무법인 소망 변호사는 “권리금 계약서를 쓰면 현재는 권리금을 받는 측이 부가가치세나 양도세 등을 내야 해 꺼리는 측면이 있다”며 “권리금 계약서가 활성화될 때까지 세금 감면이나 환급 등의 정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치권에서 최근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논의가 무르익고 있다. 하지만 자영업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법안 내용에 심드렁할 뿐이다. 개정안은 계약갱신청구권을 기존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고 권리금 회수 보호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게 골자다.

또 권리금 보호 대상에 매장 면적 합계 3000㎡(약 909평) 이상의 상설 점포로 백화점·복합쇼핑몰·대형마트만 포함돼 있던 것을 전통시장을 추가로 포함하는 것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계약서 양성화나 분쟁조정위원회 설치 같은 구체적인 방안은 포함돼 있지 않다.

이상혁 상가정보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권리금 분쟁을 시장에 내맡기면 약자인 자영업자만 피해를 보게 된다”며 “정치권 등에서 더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정훈·함종선 기자 cc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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