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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조작의 유혹①] 그리스 8년 걸린 구제금융…시작은 '통계 조작' 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근 사임을 발표한 황수경 전 통계청장.

최근 사임을 발표한 황수경 전 통계청장.

 지난달 황수경 통계청장이 취임 13개월 만에 경질됐습니다. 임기(2년)를 약 절반 밖에 못 채운 것이지요. 청와대는 “정례적인 인사”라고 설명했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사임에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통계청이 지난달 23일 발표한 올해 2분기 가계 동향 조사에 따르면 1분위(하위 20%) 가구의 명목 소득은 전년 대비 7.6% 낮아진 반면, 5분위(상위 20%)의 소득은 10.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치상으로 보면 소득 분배가 악화된 것이지요.

 야당 등 일부 정치권은 이런 사실을 언급하며 “황 청장이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기조에 찬물을 끼얹은 괘씸죄로 경질된 게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통계는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쓰이는 주요 지표입니다. 만약 정부기관이 의도적으로 지표에 함부로 손댔다간 국민의 신뢰를 잃는 건 물론이고, 대외 신뢰도까지 크게 추락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통계를 조작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자초한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의 사례를 살펴볼까요.

 그리스 재정 적자 절반 축소 조작…유럽 금융위기 불렀다

2010년 당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 [블룸버그=연합뉴스]

2010년 당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 [블룸버그=연합뉴스]

 지난 2000년 6월 그리스 정부는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6%”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재정 적자는 발표치의 두 배 수준(12.5%)였지요. 그리스 정부가 유로존에 가입하기 위해 실제 재정 적자 규모를 숨긴 것이었습니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연합(EU)의 재정 건전국과 어깨를 견줄 만큼 튼실해 보였던 그리스의 통계 조작 사실은 약 9년 후 EU의 회계 실사에서 적발됐습니다. 사회당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 스스로도 “과거 정권의 재정 통계는 엉터리였다”고 실토했지요.

 EU 회원국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게임은 끝났다. 이제 제대로 된 수치를 가져오라”고 공개 주문했고, 또 다른 EU 위원들은 그리스 정부가 수정해 발표한 적자 규모(12.5%)마저도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지요. (※실제로 그리스의 부채가 추가로 드러나면서 재정 적자는 12.5%(발표치)에서 13.6%로 1.1%포인트 가량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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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그리스는 국가 부도 위기를 맞습니다. 국가 신용 등급은 A에서 BB+로 급락했고, 국채 가치 역시 곤두박질쳤지요. 또 EU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긴축 재정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받아들여야 했지요. 그리고 그리스는 9년만인 올해 8월 간신히 구제 금융에서 졸업합니다.

중국 지방 관료들, 실적 위해 성장률 부풀려

 『중국 빚의 만리장성(China's Great Wall of Debt』의 저자인 멕 마흔은 중국을 “암흑 상자(black box)”라고 표현했습니다. 중국 정부·기업의 불투명한 통계 관리를 빗댄 것이지요.

 실제로 최근 중국 지방 정부들은 통계 조작 사실을 실토한 뒤 잇따라 지표를 수정했습니다. 지난 1월 중국 동북부 톈진 빈하이신구 정부가 기존에 밝힌 2016년 GDP 규모를 1조 위안(170조 원)에서 6654억 위안(112조 원)으로 교정한 것이지요.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기존에 빈하이신구가 발표했던 3개년 GDP 발표치는 2013년 8000억 위안(135조 원)→ 2014년 8700억 위안(147조 원)→ 2015년 9300억 위안(157조 원)으로 꾸준히 상승세였습니다.

 교정치대로라면 2016년 텐진 빈하이신구는 전년도에 비해 무려 35%(9300억 위안→6654억 위안)의 ‘마이너스 성장’을 한 셈이 됩니다.

 앞서 지난해엔 랴오닝성 지방 정부가 ‘성장세’라고 발표했던 2016년 경기가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부진했다는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같은 해 충칭시도 재정 수입을 16억 위안(2700억원) 부풀린 사실을 인정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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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지방 정부의 통계 조작이 만연한 이유에 대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역의 경제성장은 곧 지방 관료의 실적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실적 평가 항목은 지방 경제성장률, 세수 증가 여부 등으로 구성돼 있다”며 관료들이 통계 조작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중국 지방 정부의 자발적인 통계 정정은 ‘시진핑(習近平) 2기’를 맞은 중국의 정책 전환에 따른 측면이 강합니다. 앞서 인민일보 해외판 소셜미디어(SNS) 계정인 샤커다오 역시 “시진핑은 통계 조작을 증오하기 때문에 지방 관료들은 통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통계 조작을 저지르는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의 재정 지원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현금 부족’ 인도, 분기 성장률이 무려 7%?

인도의 명관광지인 후마윤의 묘를 방문 중인 관광객들. [로이터=연합뉴스]

인도의 명관광지인 후마윤의 묘를 방문 중인 관광객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16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화폐 개혁을 선언했습니다. “고액권(500·1000루피)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데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위조지폐가 많다”는 취지에서였죠. 구권 500루피와 1000루피의 유통은 중단됐고, 그 대신 신권 500루피와 2000루피가 발행됐습니다.

 화폐 개혁의 여파는 적지 않았습니다. 소비가 위축됐고, 생산 활동에도 차질이 생겼지요. 당시 국제통화기금(IMF)는 인도의 화폐 개혁에 따른 영향을 고려해 GDP 전망치를 7.6%에서 6.6%로 하향 조정했습니다.

 영국 BBC 역시 “1980년 이래 최악의 경제 둔화”라고 표현하며 인도의 경제 성장률이 5% 이하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지요.

 그러나 이듬해(2017년) 3월 인도 국가통계청은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화폐 개혁이 단행된) 2016년 4분기의 GDP 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 7% 증가했다”는 것이었지요.

인도가 새로 내놓은 2000루피 신권. [신화통신=연합뉴스]

인도가 새로 내놓은 2000루피 신권. [신화통신=연합뉴스]

 주요 외신과 이코노미스트들은 “신뢰하기 어렵다”며 의구심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골드만삭스는 인도의 각종 ‘세부 지표’가 통계청의 이같은 발표를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인도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한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는 “인도 정부는 당기(2016년 4분기) 인도의 민간 소비가 견실한 증가세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주요 인도 기업의 매출은 하락세였고, 순수출 역시 직전 2, 3분기에 비해 크게 줄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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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정부가 밝힌 성장률과 엇박자를 내는 각종 지표를 근거로 ‘통계 왜곡 의혹(potential distortion)’을 제기한 것입니다. 또 로이터통신은 “인도의 경제 성장률을 예측하는 건 미국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재정 분식 회계가 도화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통계 조작이 정권 붕괴로 이어진 적도 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이끈 프랑스 대혁명(1789~94년)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입니다.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의 초본. [위키피디아]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의 초본. [위키피디아]

 1781년 스위스 은행가 출신 자크 네케르 프랑스 재무총감은 정부의 재정 상태를 담은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총 수입 2억6415만 리브르 가운데 2억5395만 리브르를 지출해, 약 1020만 리브르의 흑자를 기록했지요.

 불과 4년 전만 해도 프랑스는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이자로 낼 정도로 재정난에 허덕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프랑스 정부가 짧은 시간에 재정 흑자를 기록한 비결은 네케르의 수치 조작에 있었습니다. 약 5000만 리브르가 넘는 군사 및 부채 지출을 ‘특별 지출’로 간주해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이지요. 이른바 분식 회계입니다.

 비록 일부 조작이 있었지만 국가 재정이 대중에 공개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이 보고서가 왕실의 지출 내역까지 낱낱이 언급했기 때문이지요. 특히 ‘2570만 리브르가 궁정과 왕실에 쓰인다’는 사실에 프랑스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정부의 경상 지출의 10분의 1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결국 본의치 않게 네케르는 왕실의 재정 낭비를 폭로(?)한 셈이 되었지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위키피디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위키피디아]

 이후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루이 16세를 압박해 네케르를 해임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자 성난 군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결국 재정 보고서 한편이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통계 조작의 유혹]은 다음 편 ‘美 시카고대의 추적…왜 독재 정권은 GDP를 조작할까’에서 이어집니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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