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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림역에만 치킨집 790개, 각자도생 한국 사회의 그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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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호 02면

[SPECIAL REPORT] 사회자본 왜 필요한가

‘각자도생 사회’ ‘저신뢰 사회’. 요즘 한국을 일컫는 용어들은 전형적인 ‘사회자본 부족 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회자본은 신뢰, 협력, 상부상조하는 인간관계 등으로 측정되는 무형의 자본이지만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한 20세기 말부터 경제자본·인적자본에 이어 경제를 확장하는 제3의 자본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국제기구들은 사회자본 늘리기를 권고하고, 선진국들은 사회자본 기반의 새로운 자본주의 실험에 한창이다. 사회자본이 큰 나라일수록 각종 사회 및 경제개혁의 속도도 빠르다. 중앙SUNDAY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 시장의 성장과 경제개혁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사회자본의 취약성에 주목하고, 한국 사회자본의 현주소를 탐색했다.

생계형 창업 64%, OECD 최고 #불신 탓 동업 대신 나홀로 장사 #한국 대학생 81% “고교는 전쟁터” #공정성 불신에 ‘대입 공론화’ 실패 #사회적 합의 따른 변화 가로막아 #글로벌 시장경쟁서 뒤처질 우려

서울 신도림역 인근 포스빌과 신도림자이아파트 사이 100m 남짓 공원로엔 치킨집만 8개가 있다. 한 지도앱에 ‘신도림역 치킨’이라는 검색어로 실행해 보니 점포 수가 790개나 나왔다. 신도림역이 특별히 치킨집의 메카여서가 아니다. 다른 전철역 주변도 치킨집의 빨간 풍선은 무수히 뜬다. ‘자영업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고용 참사’로 불리는 최악의 실업률 속에서 서민들이 생계형 창업에 나서는 ‘자영업 대한민국’은 현실도 전망도 우울하다.

이스라엘은 기회추구형 창업이 58%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고용원 없는 ‘나홀로 사장’은 올 6월 기준 404만 명, 무급 가족종사자는 118만 명이다. 자영업은 연간 10개가 문을 열고 9개가 문을 닫는다.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소상공인의 현실은 단순히 사회 문제를 넘어 최저임금 갈등과 같은 사회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현 정부 경제정책의 근간인 ‘소득주도 성장’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임금 인상에서 내년 최저임금은 8350원. 한국의 경제적 위상으로 볼 때 높은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식에 소상공인이 거리투쟁에 나섰다. 소상공인들은 실질적으로 생존권에 위협을 느끼는 수준이어서다.

이를 놓고 정가에선 ‘소득주도 성장의 허황함’과 ‘최저임금 인상의 무리함’을 지적하며 정쟁을 벌이고, 여론도 들끓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구조적인 자영업 경제, 생계를 위해 자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상황 그 자체다. 한국은 동업하지 않는 나홀로 창업이 대세를 이룬다.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가운데 서민층은 생계를 위해 창업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생계형 창업(64%) 비율이 가장 높고, 기회추구형 창업(21%)은 가장 낮다. 창업 강국인 이스라엘의 경우 기회추구형 창업(58%)이 생계형(13%)을 압도한다. 미국·영국·일본 등의 생계형 창업은 22~30%대(2014년 기준)다.

‘동업이 안 되는 나라’. 신도림역 8개 치킨집이 동업해 1~2개로 된다면 참여자들은 임대료와 인건비 부담 등을 서로 덜 수도 있고 조리·배달 등 분업도 가능하며 여유시간도 늘어 삶의 질도 좋아질 수 있다. 서유럽과 북미 국가의 창업 형태는 두 사람 이상의 파트너십, 합명회사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인은 ‘각자도생’을 선택한다. 동업에는 상호 신뢰가 전제조건인데 한국엔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자본이 결정적으로 부족해서다. 사회자본을 측정하는 신뢰, 인간관계(사회적 연결망), 규범 등의 요소에서 한국이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지표로도 확인된다.

지난 30년간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s Survey) 추이를 보면 30년 전(1981~84)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수 있다’에 동의한 한국인은 38%였지만 이후 응답률은 계속 하락해 최근(2010~2014)엔 27%로 11%포인트나 낮아졌다. 같은 기간 미국이 8%포인트(43%에서 35%로) 떨어졌고, 독일·스웨덴 등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OECD 2006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의 타인에 대한 신뢰는 35개국 중 23위, 정부에 대한 신뢰는 34개국 중 29위였다.

일반적으로는 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사회 신뢰도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대개의 자본주의 진영 국가는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유럽권은 교육 수준과 사회적 신뢰의 상관도가 낮은 경향이 있는데 한국도 동유럽권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낮은 신뢰는 세대차도 없다. 국제교육협의회(IEA, 2009)가 세계 36개국 중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 학생들의 정부와 학교에 대한 신뢰는 각각 20%와 45%로, 세계 평균(62%, 75%)을 크게 밑돌았다. 관계지향성, 사회적 협력, 갈등 관리 등 사회자본의 수준을 측정한 이 조사에서 한국 중학생들은 36개국 중 35위를 했다.

준법·협력정신도 미·중·일보다 낮아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사회자본을 늘리는 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학교도 한국에선 별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희삼 위원이 최근 발표한 사회자본에 대한 교육의 역할과 관련한 연구물 결과는 경쟁만 있고 협력과 신뢰는 없는 한국 학교의 현실을 보여 준다. 이 연구에선 한국·중국·일본·미국 등 4개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사회자본에 대한 인식을 조사해 비교했다. 여기에서 고등학교를 어떤 곳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한국 학생들은 80.8%가 사활을 건 전장이라고 답했다. 중국(41.8%), 미국(40%), 일본(13.8%)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국 학생들은 동료 학생들의 성취에 대한 평가도 박했다. 고등학생이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만든 방학숙제가 부모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기여도는 절반 미만일 것이라고 보는 한국 학생은 57.6%나 됐다. 다른 나라 학생들은 40%대였다. 또 명문대 진학에는 부모의 경제력이 큰 영향을 준다고 응답한 한국 학생은 85.2%나 됐다. 미국 74.3%, 일본 61.8%, 중국 56.6% 순이었다. 기말고사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의향을 묻는 ‘협력 수준’을 테스트한 문항에서도 한국 대학생들은 협력의사가 가장 낮은 경향을 보였다. 준법·협력·봉사정신 등 사회적 자본의 수준을 측정하는 항목에서도 4개국 중 가장 낮았다.

대부분의 개혁 시도도 갈등 치달아

한국의 낮은 사회자본은 연대와 협력이라는 인간관계의 확장성을 저해하고, 폐쇄적인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는 현상을 가져온다.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고립된 개인 현상’은 심각하다. 특히 학력이 낮을수록 주변엔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 갤럽의 세계여론조사(2013)에 따르면 믿고 의지할 친척이나 친구가 있다는 문항에 OECD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대졸 이상은 10명 중 9명 이상, 고졸 이하는 8명 정도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대졸 이상은 8명, 고졸 이하는 4명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꼴찌였다. 타인과 정부도 못 믿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한국인들. ‘각자도생 사회’ ‘저신뢰 사회’로 지칭되는 한국 사회자본의 현주소다.

낮은 사회자본의 후유증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교육부가 대입제도 개선에 국민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며 ‘묘약’처럼 도입했던 ‘대입 공론화’의 실패와 후유증은 정성적 평가에 대한 불신, 학생의 능력을 위장하는 불공정 경쟁에 대한 의심, 학생부 조작과 문제지 유출 등 낮은 준법 정신, 전문가와 관료 및 대학에 대한 불신 등이 엉켜 이루어진 결과다. 객관식 선다형 시험에서 벗어나기 힘든 국내 학교 평가제도는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만연한 결과다. 건설이나 정부 조달 등 각 분야에선 경쟁입찰이 아닌 최저가 입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가격 일변도 입찰로 인해 부실 시공이나 사후 설계 변경에 다른 추가 대금 청구 등 부작용은 관행적 리스크로 상존한다. 이 같은 사회자본의 척박함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발전적 변화’를 어렵게 한다. 변화·개선·개혁을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곧바로 논란과 갈등으로 치닫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변화’라는 의제마저 표류하도록 한다. 실제로 시장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한 20세기 말부터 유럽과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이 새롭게 실험하는 사회적경제 등은 모두 탄탄한 사회자본을 기반으로 한다.

사회자본

물적자본 형태인 ‘경제자본’ 근로자의 교육수준 등으로 측정되는 ‘인적자본’처럼 명쾌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신뢰, 협력, 사회구성원  간의 지지와 연대 등으로 구성된 무형의 자본이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성장과 사회발전뿐 아니라 자본을 소유한 개인에게도 이익을 준다는 점에서 ‘제3의 자본’으로 꼽힌다. 사회자본이 큰 나라는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믿고 교류하며, 거래와 계약·동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공공기관에 대한 믿음과 준법정신 등이 높다. 사회자본이 큰 나라들일수록 활발한 경제활동이 일어나고 행복도가 높다.

양선희 선임기자 sunny@joongang.co.kr

◆KDI 공동기획 참여연구원=김용성 공공경제연구부 선임연구위원, 김정욱 규제연구센터소장, 김희삼 경제전략연구부 겸임연구위원(GIST 교수), 김태종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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