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추석 오락프로 '또 그 얼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연휴 때 TV오락프로는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현란하다 못해 요란하고 소란스럽다. 그런데 거기 초대된 면면을 보자. 대체로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마치 그들만의 축제인 것 같다. 특집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특집이면 특별한 게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몇몇은 아예 오락프로 싹쓸이를 해서 이 분야 기록을 세우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다. 자연스럽게 '독과점'이란 용어가 떠오른다.

제작자와 시청자, 그리고 출연자 세 파트로 나누어 입장 정리를 해 보자. 제작자는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아 수익(시청률)을 높이고자 한다. 욕심 같아서야 심은하도 부르고 싶고 서태지도 부르고 싶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그러니 그냥 전화 한번으로도 부를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을 부르게 된다. 그들은 시간만 허락하면 초대에 순순히 응해주는 온순한 사람들이다.

시청자는 당연히 짜증난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게 문제라기보다 그 재주가 그 재주인 게 문제다. 그들은 자기복제의 명수들이다. 이 집 잔치에서나 저 집 잔치에서나 똑같은 재주를 선보인다.

일관된 캐릭터로 얄팍한 재주를 낭비하거나 소모한다. 식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은 시청자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건 오해다. 그의 가족이나 팬클럽을 위해서라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게 낫다.

출연자인들 할 말이 없겠는가. 누가 불러 달라고 애원했는가 말이다. 그저 오라고 해서 갔고, 갔으니까 가진 재주로 재롱을 떨 수밖에 없다. 제작진에 대한 우정이고 시청자에 대한 봉사다.

그러나 잔칫집을 이동하며 달리는 차안에서 차분히 생각해 보라. 우정일진 모르지만 봉사는 아무래도 낯간지럽다. 시청자는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새로운 얼굴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 말이다.

그러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나 설득력보다 순발력으로 자주 승부하다 보면 금방 바닥이 난다.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변명이다. 거절하는 것도 실력이다. 실력 있는 자만이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다.

잘 팔리는 물건에는 이유가 있다. 중요한 건 연예인이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기도 중요하지만 그 인기를 길게 끌고 가는 '생명 연장의 꿈'도 포기할 수 없다. 순간의 인기는 마약과 같다. 시효가 너무나 짧다.

서태지가 달걀 세례를 받던 광고의 카피는 연예학당의 급훈으로 삼을 만하다.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없다면 나타나지도 마라." 보여줄 것이 있을 때 멋지게 나타나서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라. 방전의 시간보다 충전의 시간을 더 길게 가져라.

이제 출연자의 양식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제작진은 '그 사람이 어디 어디 출연하는지 일일이 체크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출연자 스스로 자기가 보여줄 수 있는 마당을 물색하여 오랜 기간 열심히 준비한 기량으로 시청자를 기쁘게 하라.

결국은 모두의 이익이 된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간판은 치워버려라. 제작진 또한 아이디어 개발에 더 시간을 쏟고 포용력 있는 캐스팅보다는 자존심 있는 캐스팅에 시간과 정열을 배분하라. 시청자는 달걀 던질 준비가 늘 되어 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