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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막혀 … ‘잡스 암’ 고치러 해외 가는 환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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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희귀암인 췌장 신경내분비종양을 앓고 있는 황모씨(오른쪽)가 지난 1월 말레이시아 현지 병원에서 루테슘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 한국신경내분비종양환우회]

희귀암인 췌장 신경내분비종양을 앓고 있는 황모씨(오른쪽)가 지난 1월 말레이시아 현지 병원에서 루테슘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 한국신경내분비종양환우회]

희귀암인 신경내분비종양 환자 황모(32)씨는 두 달마다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방사성동위원소 ‘루테슘’을 활용한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그는 2016년 3월 췌장에 신경내분비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세가 심각했지만 국내에서는 치료법이 없었다. 검색을 통해 루테슘 치료방법을 찾았지만 국내선 이 치료를 받을 길이 없어 말레이시아로 갔다. 효과는 분명했다. 5차례 치료했더니 췌장에 있던 10㎝ 크기의 종양이 4㎝로 줄었다. 간에 있던 4~5㎝ 크기의 종양 여러 개는 거의 사라졌다. 30㎏이나 줄었던 몸무게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음 달엔 회사에 복직한다. 황씨는 “한 번 갈 때 1000만원(항공료 포함) 든다. 부담되지만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신경내분비종양 없애는 루테슘 #식약처 허가 못 받아 국내선 못 써 #말레이시아 항공료 포함 1000만원 #“치료법 제한된 말기암엔 허용을”

황씨처럼 말레이시아행 원정 치료를 받은 환자는 60여명이다. 해외에선 검증된 치료방법이지만 국내에선 불법이다. 강건욱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는 “해외 원정치료를 받아야만 할 정도의 국내 중증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는 1000여명 정도”라고 말했다.

신경내분비종양은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앓은 암이다. 특정한 부위에 발생하는 다른 암과 달리 췌장·위·소장·대장 등의 신경내분비세포에 암이 생긴다. 증상이 없어 주로 말기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항암제 치료를 받지만 효과가 크지 않다.

해외에선 루테슘 치료 방법이 대안으로 쓰인다. 방사능을 내뿜는 원소 루테슘을 체내에 주입해 종양을 제거한다. 암세포에만 있는 소마토스타틴이란 수용체를 찾아내 공격한다. 천기정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는 “루테슘 치료가 신경내분비종양 환자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해외에선 수십년 전부터 실제 치료 사례와 논문으로 입증됐다”고 말했다. 독일·호주·말레이시아 등에서 치료가 이뤄진다.

루테슘은 다른 말기암 치료에도 사용된다. 장태안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7년 전 전립선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부터 해외에서 5차례 루테슘 치료를 받았다. 장 교수는 “지난해 ‘항암치료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듣고 루테슘 치료를 시작했다. 지금은 상태가 상당히 나아졌다”고 말했다. 국내 대형병원도 기술은 있지만 치료는 할 수 없다. 루테슘이 식품의약품안전처 사용 허가를 받지 못해서다.

서일식 한국신경내분비종양환우회 회장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말기 암 환자는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이라며 “현지 도착 직후 쇼크가 와 곧바로 중환자실로 이송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국내 진료가 아니라서 재난적 의료비 등 건강보험을 통한 지원을 못 받는다”고 말했다.

최근 해외에선 루테슘을 활용한 치료제까지 개발됐다. 다국적제약사 노바티스가 인수한 프랑스 항암제 개발업체가 지난해 루테슘을 기반으로 한 방사선 미사일 치료제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지난 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아직 국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격도 약 4만 달러(약 4500만원)로 비싸다. 안기종 대표는 “국내 환자 수가 많지 않아 제약사의 시장 진출 의지가 약한 것 같다” 말했다.

전문가들은 말기 암처럼 치료법이 제한된 환자에겐 의사 판단에 따라 다양한 항암 치료를 허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강건욱 교수는 “독일·호주·말레이시아 등은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환자에게 다른 치료법이 딱히 없을 때 허가 나지 않은 의약품 치료를 허용한다”며 “국내도 이 같은 ‘동정적 치료’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료제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천기정 교수는 “해외에서 보편화된 치료인 데다 사람 대상 학술 논문까지 다수 발표된 치료의 경우, 임상시험부터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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