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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타봤습니다] 현대차의 새로운 도전, 벨로스터N 시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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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N이 국내에 처음 출시한 벨로스터N [사진 현대자동차]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N이 국내에 처음 출시한 벨로스터N [사진 현대자동차]

1990년대 중반 처음 운전면허를 딸 때 주변에선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1종 보통이지.”
당연하게도 1.5t 트럭으로 운전을 배웠고 면허취득의 최대 관문인 경사로 정차 후 출발에 성공하기 위해 무던히도 ‘반(半) 클러치’ 연습을 했더랬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수동변속기는 화석 같은 존재가 됐다. 현재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수동변속기 등록 비율은 1%에도 미치지 않는다. 일부 상용차와 특수차를 제외하면 승용차에선 수동변속기 선택이 가능한 차량도 거의 없다(현대차 4종, 기아차 3종). ‘남자는 수동’ 같은 얘길 하면 이른바 ‘꼰대’ 취급을 받기십상이다. 그런데 수동변속기만 장착해서 판매하는 차량이 있다. 그것도 지난 6월 출시된 따끈한 신차다.

N을 만나다
지난 17일 경기도 고양시 현대모터스튜디오고양 지하주차장에서 벨로스터N의 키를 건네받았다. 면허 취득 후 10년 동안 수동변속기 차량만 운전했다고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마지막 수동변속기 차량 운전은 2008년 제네시스 쿠페였다. 현직 자동차 담당기자 중에 수동변속기 조작이 가능한 기자가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벨로스터N은 시승차조차 없다. 현대차에선 “출시 행사를 제외하면 일간지 기자 중 첫 시승”이라고 했다.

벨로스터N의 인테리어 모습. 스티어링휠 아랫쪽 N버튼을 누르면 고성능 DNA가 발현된다. [사진 현대자동차]

벨로스터N의 인테리어 모습. 스티어링휠 아랫쪽 N버튼을 누르면 고성능 DNA가 발현된다. [사진 현대자동차]

주차장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벨로스터N의 색깔은 시그니처 컬러인 ‘퍼포먼스 블루’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지만 연한 파란색이다). 광고에서 많이 봐서인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N은 현대차가 2017년 선보인 고성능 브랜드다(올해 월드컵 광고판에 집중적으로 노출됐다!). BMW의 M디비전이나 메르세데스-벤츠의 AMG처럼 모터스포츠를 기반으로 축적한 기술을 활용해 운전하는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고성능 차량을 만든다는 컨셉이다. 벨로스터N은 유럽에서 출시한 i30N에 이어 두 번째 선보인 N브랜드 차량이며, 국내에선 처음 출시됐다.

시승차량은 퍼포먼스 패키지 모델로 최고출력 275마력을 내는 2리터 터보 직분사 가솔린 엔진(T-GDI)이 달렸다. 벨로스터N 전용으로 개발된 엔진이다. 준중형 해치백에서 보기 드문 19인치 휠에 235㎜ 광폭타이어가 달렸다. 타이어는 벨로스터N 전용으로 개발된 피렐리의 고성능 타이어 피제로. 휠 안쪽에는 N로고가 선명한 빨간색 대용량 브레이크 캘리퍼가 보였다. 후면엔 공력(空力) 성능을 높이기 위해 장착된 날개 모양의 리어 스포일러와 고속 주행시 공기 흐름의 저항을 막기 위해 설계된 대형 에어핀, 2개의 대형 배기 파이프까지 온몸으로 고성능 차량임을 어필하는 외관을 갖췄다.

벨로스터N의 시그니처 컬러 '퍼포먼스 블루'. 어디서 본 느낌이 있긴 하지만 N로고와 함께 연한 푸른색, 붉은색의 조합은 매우 훌륭하다. [사진 현대자동차]

벨로스터N의 시그니처 컬러 '퍼포먼스 블루'. 어디서 본 느낌이 있긴 하지만 N로고와 함께 연한 푸른색, 붉은색의 조합은 매우 훌륭하다. [사진 현대자동차]

스포츠 버킷 타입의 운전석에 올라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시동버튼을 눌러봤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몇 초 후 실수를 깨달았다. 수동변속기 차량은 클러치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함께 밟은 상태에서 시동을 걸어야 한다. 후진 기어를 넣고 클러치를 서서히 떼며 전면 주차된 차량을 움직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지상 도로로 나가려면 20년 전 면허시험장에서 진땀을 빼게 했던 경사로 주행이 기다리고 있다. 1단으로 변속한 뒤 주차장을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가속페달을 밟아 속도를 붙이니 계기반에 2단으로 변속하라는 안내가 뜬다. 수동변속기 차량은 RPM 게이지를 보고 ‘감으로’ 변속하는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운전자의 변속 타이밍까지 알려준다. 똑똑한 건지, 운전자를 무시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지상으로 올라와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차가 멈춘다. 속도가 줄었으니 저단으로 변속하든지 중립으로 바꿔 동력연결을 끊어야 했다. 예전 수동 변속기 차량은 시동이 꺼지면 ‘푸드덕’ 하면서 멈췄는데 이 녀석은 소리 없이 멈춘다. 계기반에 잔뜩 들어온 경고등 표시가 아니었다면 시동이 꺼진 줄도 몰랐을 뻔했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하고 몰래 시동을 걸어보려 했는데 이 녀석은 너무 시끄럽다. 시동을 거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쳐다본다.

도심과 자유로, 공항고속도로가 섞여있는 왕복 100km 구간에서 벨로스터N을 시승했다. [네이버 지도 캡처]

도심과 자유로, 공항고속도로가 섞여있는 왕복 100km 구간에서 벨로스터N을 시승했다. [네이버 지도 캡처]

이 녀석 물건인데?
목적지를 인천국제공항으로 잡았다. 왕복 100㎞ 가량 되는 구간으로 평일이어서 차량 통행량은 적은 편. 일산 도심구간과 자유로, 인천공항고속도로가 섞여 있는 코스다. 일산 도심을 빠져나가면서 수동변속기 조작의 감을 익혔다(자유로에 접어들기까지 겨우 두 번(!) 밖에 시동이 안 꺼졌다). 10년 전 독일 ZF의 6단 수동 변속기가 장착됐던 제네시스 쿠페의 기억과 비교하면 변속감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부드러운 체결감과 적절한 클러치 깊이까지 운전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단수로 변속할 수 있는 변속기 궁합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인천공항고속도로에 올라 6단으로 변속하고 항속주행을 해 봤다. 스티어링휠에 달린 N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차량의 성격은 크게 달라진다. 능동 가변배기 시스템과 전자식 사운드 제너레이터가 달린 벨로스터N의 배기음은 우렁차다. 어려운 말 같지만 주행 상태에 따라 배기 경로를 바꿔 배기음을 다르게 만들고, 실제 엔진음과 가상 엔진음을 합쳐 운전자에게 들려준다는 얘긴데, 사운드 제너레이터가 달린 차량의 경우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벨로스터N의 엔진음과 배기음은 고성능 자동차에 익숙한 운전자라 해도 크게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지 않았다.

완성차 업체의 고성능 브랜드는 철학이 담기기 마련이다. BMW의 M은 일상의 즐거운 드라이빙을 모토로 하기에 뛰어난 운전실력을 갖지 않은 운전자도 비교적 쉽게 조작할 수 있다. 반면 메르세데스-벤츠의 AMG는 극한의 주행환경으로 몰아붙일수록 운전자의 실력을 시험한다. 현대의 N은 전자에 가깝다. 고속에서 스티어링휠은 적당히 묵직해지지만 조작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공도(公道)인데다 구간단속까지 있어 제한속도 내에서 성능을 시험해봤다. 수동변속기의 특성상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도 엔진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속도가 줄어든다. 벨로스터N이 광고에서도 자랑하는 ‘팝콘 사운드’는 고회전 주행시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거나 변속할 때 발생하는 후연소(後燃燒) 음이다. 연료분사를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기능인데, 일반 운전자에겐 감성적 측면이 더 크다. 배기량과 출력이 작은 차량이어서 메르세데스-벤츠의 AMG나 수퍼카에서 들리는 폭발 배기음과는 다르지만, 일상 주행에선 눈길을 덜 끈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고속에서의 스티어링휠 조작은 날카롭다. 굽은 도로에서 전륜차 특유의 언더스티어(바깥으로 밀리는 현상)는 거의 느낄 수 없다. 현대차가 ‘N코너 카빙 디퍼렌셜’이라고 이름 붙인 전자식 차동 제한장치(e-LSD)와 전자식 제어 서스펜션 덕분인데, 실제 굽은 도로에서 현대차의 자랑이 빈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코너링이 가능했다. e-LSD는 프리미엄 브랜드인 제네시스에도 장착되지 않은 기능이다.

시속 120㎞ 가까운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 버스 한 대가 앞으로 급하게 끼어들었다. 브레이킹과 함께 기어를 저단으로 변속하는데 동력 손실이 거의 없이 신속한 변속이 가능했다. 차선을 바꾼 뒤 곧바로 가속페달을 밟아 항속 상태로 돌아오는 데 무리가 없었다.

벨로스터N에서 만족스러웠던 두 가지 기능은 앞서 말한 e-LSD와 ‘레브 매칭’ 기능이다. 기술적으로 복잡한 얘기지만 모터 스포츠에서 신속한 저단 변속을 하기 위해선 고급 운전기술을 써야 한다. 레이서들은 굽은 도로가 나오면 왼발로 클러치를 밟고 오른발 앞꿈치로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상태에서 회전수를 높이기 위해 가속페달은 오른발 뒤꿈치로 밟고 변속하는 ‘힐앤토(heel and toe)’ 기술을 쓴다. 레브 매칭은 이런 고급기술 없이도 신속한 변속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일상 주행에서 이런 기능이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 다만 평일 공항고속도로에서 난폭운전을 하는 차량을 만났을 때 크게 속도를 줄이지 않고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점은 놀라웠다. 급감속을 하면 뒤에 따라오는 차량도 위험해질 수 있다.

일상 주행도 무리 없어
2박 3일의 시승기간 동안 남은 이틀은 극악의 휴일 정체 속에서 도심 구간을 주행했다. N모드가 아닌 상태의 벨로스터N은 충분히 데일리카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하 주차장에서 배기음이 시끄러운 것만 빼면, 스포츠 모드가 아닌 상태에선 비교적 부드러운 거동이 가능하다.

토요일 오후 이케아 고양점에서 평촌CGV까지 왕복 78㎞ 구간을 일반 모드로 주행했는데 트립 컴퓨터상의 연비는 리터당 10㎞ 이상을 보여줬다. 시승기간 전체 연비가 11.4㎞/ℓ였는데 제원상 복합연비가 10.7㎞/ℓ인 점을 생각하면 수긍할만한 수준이다.

편의장비와 가격을 생각하면 역시 국산차가 갑(甲). 이 정도 성능에 가격은 3000만원이 넘지 않는다. [사진 현대자동차]

편의장비와 가격을 생각하면 역시 국산차가 갑(甲). 이 정도 성능에 가격은 3000만원이 넘지 않는다. [사진 현대자동차]

오랜만의 수동변속기 차량 운전은 재미있지만 솔직히 피곤했다. 시승을 마친 뒤 자동변속기 차량인 내 차를 몰 때 나도 모르게 기어노브를 잡고 있는 걸 깨달았다. 속도가 줄어들면 왼발로 풋레스트 대신 클러치가 있어야 할 위치를 밟는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5위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가 이제라도 훌륭한 고성능 차량을 선보였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모터 스포츠에 투자하는 건 이 과정에서 쌓은 노하우를 일상의 운전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6월 출시 이후 지금까지 예약 대수는 941대. 수동변속기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운전자가 제한적인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숫자다. 신차를 출고한 고객들의 만족도도 높다. 편의성능도 뛰어나다. 애플 아이폰을 사용하는 기자가 애플 카플레이를 통해 각종 멀티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이번 시승의 또다른 재미였다.

벨로스터N은 ‘예상보다 훌륭한’ 차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훌륭한 차였다. 재미없고 잘 팔릴 차만 만든다는 현대차의 평판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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