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꼰대의 반대말 '네오 사피엔스'…호기심 넘치는 지식정보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간다 | 김동호의 네오 사피엔스

냉방이 잘 돼 쾌적하기 그지없는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장년들. 김동호 기자

냉방이 잘 돼 쾌적하기 그지없는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장년들. 김동호 기자

인간 수명이 100살에 가까워지면서 전에 없던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퇴직 후 시간 보내기’다. 부족한 노후자금 충당을 위해 재취업·창업으로 일손을 놓지 못하는 게 현실이긴 해도 일흔을 넘어서면 일자리에서 대부분 떠나는 것 역시 현실이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20~30년의 세월을 보내야 할까. 도서관에 가보면 이미 현실이 된 미래가 보인다. 학생을 비롯한 청년 수험생들로 가득 찼던 도서관이 어느새 중장년들이 넘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사회ㆍ경제ㆍ문화적 행태가 과거 세대와 다른 ‘네오 사피엔스(100세 시대의 신인류)’가 처음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 현장을 돌아봤다.

도서관마다 베이비부머 북적북적 #전문서 읽거나 책 쓰는 사람 많아 #첫 고등교육 세대의 새로운 현상 #술 마시고 골프만 쳐선 꼰대 전락 #서울ㆍ부산 등 도서관 확충 바람 #퇴직 후 30년 세월 보낼 오아시스

숲 속에 파묻혀 독서에 집중하기 좋은 국회도서관 전경. 김동호 기자

숲 속에 파묻혀 독서에 집중하기 좋은 국회도서관 전경. 김동호 기자

지난 14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으로 향했다. 국회 정문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의사당이 보였고 그 오른편에 국회도서관이 있었다. 숲속에 가려져 있어 금세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만큼 도서관은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다는 얘기다. 계단으로 올라서 앞으로 나아가자 도서관의 위용이 눈앞으로 쑥 다가왔다. 국회는 주로 인터뷰와 취재를 위해 드나들었지만 도서관은 처음이라 호기심을 계속 자아냈다. 간단한 출입 절차를 마치고 2층 열람실로 올라갔다.

신천지-. 열람실로 들어서는 순간 이 단어가 떠올랐다. 천정은 높고 공간이 여유롭게 배치된 열람실은 냉방이 잘 돼 폭염은 다른 세상 얘기가 됐다. “우리나라 국회에 제대로 된 것은 국회도서관 하나뿐”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 시설만큼 좋다는 얘기다.

자리를 둘러보니 역시 중장년이 많았다. 그 중에도 백발이 성성한 고령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과거의 고령자는 아니다. 눈대중으로 보니 70세 안팎의 고령자가 많았는데 한눈에 봐도 의욕이 넘치고 건강 상태가 좋아 보였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열람실을 죽 둘러봤다. 독서를 비롯해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할 수 없어 일일이 물어보지 못했지만 의외의 현상을 발견했다. 우선 이들이 다양한 책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취업에 필요한 취업서도 많았지만, 의외로 전문서적을 보는 사람도 많았다. 퇴직해서도 평소 해 오던 일과 관련해 소일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이는 현업에서 전문성을 쌓은 사람들은 퇴직 후에도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멀티미디어실에서는 온 종일 영화의 바다에 빠져도 좋다. 김동호 기자

멀티미디어실에서는 온 종일 영화의 바다에 빠져도 좋다. 김동호 기자

멀티 미디어실로 가봤더니 역시 중장년이 많았다. 쾌적한 환경에서 온종일 영화의 바다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 근처에서 눈이 마주친 김세철씨에게 말을 걸었다. 올해 73세인 그는 매주 서너 차례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나는 나이가 중간밖에 안 된다”며 “오늘은 안 나왔는데 90세 넘은 분도 나와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 선생도 나중에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100세 시대의 현실을 말한 것이다.

그는 말이 나온 김에 국회도서관 이용 방법까지 줄줄이 알려줬다. 이용자 등록을 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무료로 출입할 수 있다. 도서관에 들어가서는 전자 예약 시스템을 통해 PC 이용, 자료 열람, 영화 관람 등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구내식당이 좋다”고 했다. 식단에 따라 다양한 메뉴가 제공되고 가격은 4800원이다. 도서관 주변 숲 산책은 덤이라고 했다.

특히 퇴직 후 '삼식이'로 전락하기 쉬운 나이든 남성들에게 도서관은 오아시스가 되고 있다. 남성들은 퇴직하는 순간 인생이 많이 바뀐다. 음주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과 만나도 대화거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퇴직 후 대인관계 절벽에 서는 경우가 많다. 현업에 있을 때는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전화도 걸려왔지만 퇴직 직후부터 전화 한 통화 오지 않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산더미 같은 서가 사이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70대 이용자. 김동호 기자

산더미 같은 서가 사이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70대 이용자. 김동호 기자

이런 이유에서 서울에선 고속버스터미널 앞 국립중앙도서관, 서울 한복판에 있는 남산도서관, 경복궁에서 가까운 정독도서관은 갈수록 고령자들로 북적댄다. 대형 도서관뿐만 아니라 동네 구립도서관도 그렇다. 도서관이 더 이상 학생의 전유물이 아니란 얘기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이런 모습은 보기에 따라선 희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퇴직한 뒤에도 경제 활동으로 바쁘거나 소일거리가 있다면 도서관에 갈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많고 갈 곳은 없어지게 된다. 이럴 때 도서관만 한 곳이 없다. 김세철씨는 “책만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쓰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국회도서관 한 애용자는 90줄에 접어들었는데 거의 매일 나와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김씨가 귀띔해준 사실이다.

국회도서관 이용자가 서가에서 골라든 경제 서적을 보고 있다. 김동호 기자

국회도서관 이용자가 서가에서 골라든 경제 서적을 보고 있다. 김동호 기자

100세 시대 네오 사피엔스의 도서관 이용은 서울 선릉역 근처에 ‘최인아책방’을 연 최인아 대표가 강조하는 중장년의 시간 쓰기와 맞닿아 있다. 최 대표는 “오래 살게 될수록 배우지 않으면 꼰대가 된다”며 “어른도 술 먹고, 골프 치고, 자전거 타는 것 말고 지적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인아책방에도 일흔을 넘긴 고객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노후에도 지적 호기심을 충만하게 해주는 시간이 있어야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보다 고령화가 앞서 진전된 선진국에선 일상화돼 있다. 백발에 가까운 고령자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책을 쓰기도 한다. 이는 도서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지식정보형 사회의 생태계를 떠받치는 역할도 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런 수요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도서관 수가 부족하다. 일본에선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어 굳이 국회도서관 같은 대형 도서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영양사가 짜주는 식단에 따라 매 끼마다 메뉴가 바뀐다. 김동호 기자

영양사가 짜주는 식단에 따라 매 끼마다 메뉴가 바뀐다. 김동호 기자

그나마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도서관 확충에 나서는 것은 다행이다. 서울시는 최근 ‘도서관 발전 5개년 종합계획’을 내놓았다. 그간 도서관 인프라가 부족했던 지역을 위주로 서울 시내 5개 권역별로 시립도서관을 신설한다. 이를 포함해 앞으로 5년 동안 공동도서관 30개를 확충하기로 했다. 어린이는 물론이고 100세 시대의 고령자까지 평생 교육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도서관 자료 구입비도 기존 125억원에서 200억원 수준으로 확대해 보유 장서도 늘린다.

부산시에서는 전국 처음으로 관할 시ㆍ군ㆍ구 도서관 122개의 자료를 모두 통합하는 ‘부산도서관 통합 웹서비스 플랫폼 구축사업’이 시작됐다. 올 연말까지 모든 소장도서와 회원정보를 통합해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통합된 도서관 서비스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부산시는 623억원을 들여 연면적 1만6292㎡ 규모로 ‘부산도서관’을 짓기로 했다.

앞으로 고령자의 도서관 이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앞 세대와 달리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정보형 인간 ‘네오 사피엔스’만의 새로운 문화다. 현업 시절 시간에 쫓겨 보지 못했던 책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노후는 즐겁고 유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