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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는 다 담배 피우는 노랑머리? 스스로가 한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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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사단법인 체인지메이커 대표 송치훈(33)씨가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다. 송씨는 '돕는다'는 표현 대신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지난 15일 사단법인 체인지메이커 대표 송치훈(33)씨가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다. 송씨는 '돕는다'는 표현 대신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사단법인 '체인지메이커'의 홈페이지는 밋밋하다. 후원자를 구한다며 수혜자 사진이 없다. 싱글맘을 위한 돌잔치와 소외계층 도시락 배달 등 갖가지 지원 활동을 하지만, 이 기록에서도 마찬가지. 간혹 나와도 수혜자는 뒷모습으로만 등장할 뿐, 주로 봉사자·후원자가 중심이다. '체인지메이커'의 대표 송치훈(33)씨는 "사연의 절박함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해 후원자 모집이 쉽지 않지만 함께 하는 과정에서도 누군가는 평생 가는 상처를 받을 수 있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수혜자를 돕는다' 대신 '수혜자와 함께한다'는 표현을 꼬박꼬박 썼다.

사단법인 '체인지메이커' 송치훈 대표 #장애인·미혼모 등 소외계층 지원 활동

2015년 2월 시작한 '체인지메이커'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원해주는 구호단체다. 소년·소녀 가장에서부터 독거노인, 싱글맘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돕고 있다. 매년 싱글맘을 위해 정기적으로 돌잔치를 열고, 전국에 있는 소외계층 40여명에게 일주일에 한 번 도시락을 배달해주고 있다. 장애인, 소년·소녀 가장, 싱글맘 등 30여명에게는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지원해주며, 비정기적으로 의료비, 집 보증금이나 월세, 공과금을 지원받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어르신들을 위한 곡물 찜질팩, 싱글맘을 위한 우주복도 지원자들의 도움으로 만들어 전달하고 있다.

송치훈 씨가 체인지메이커가 개발한 점자책을 들고 있다. 탈부착이 가능한 점 부직포를 이용해 점자를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김경록 기자

송치훈 씨가 체인지메이커가 개발한 점자책을 들고 있다. 탈부착이 가능한 점 부직포를 이용해 점자를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김경록 기자

송씨는 특히 싱글맘을 위한 활동에 관심이 많다. 송씨는 '미혼모' 대신 '싱글맘'이라고 지칭했다. 송씨는 "싱글맘은 아이 아빠와는 물론 본래 자신의 가족과도 사이가 멀어진 경우가 많아 심리적·경제적으로 기댈 곳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송씨의 휴대폰에는 100여명의 싱글맘 번호가 저장돼 있다. 아이가 아프거나 급한 도움이 필요할 때 이들은 수시로 송씨를 찾는다. 송씨는 지금까지 싱글맘들을 위해 3번의 돌잔치를 열었다. 싱글맘 한 명 한 명 공들여 '신부 화장'을 해주고 축하할 충분한 시간을 주며 돌잔치를 진행했다. 송씨는 "대부분의 싱글맘이 화장할 때 왈칵하고 울더라"며 "처음에는 왜 그럴까 싶었는데,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신부 화장이었던 거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이분들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송씨가 처음부터 누군가를 돕는 일에 나섰던 건 아니다. 20대 중반 식품 회사의 영업 마케팅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송씨는 한 NGO단체의 홍보팀으로 이직했다. 그저 연봉을 맞춰준다기에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주로 기업을 만나 후원금을 요청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싱글맘과의 미팅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송씨는 "그전까지 싱글맘은 그저 10대에, 노랑머리를 하고 담배 피우며 자기 관리 못 하는 이들인 줄 알았는데 너무도 평범한 이들이었다"며 "나는 그동안 아이 버린 아빠가 아니라 아이 지킨 엄마를 욕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하고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체인지메이커'에 올라온 수혜자 사연. 수혜자의 곤궁한 사연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신 스케치로 그리고 있다. [체인지메이커 홈페이지]

사단법인 '체인지메이커'에 올라온 수혜자 사연. 수혜자의 곤궁한 사연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신 스케치로 그리고 있다. [체인지메이커 홈페이지]

인천에서 만난 한 싱글맘도 그에게 큰 깨달음을 줬다. 성폭행당해 임신한 피해자였다. 임신중절 수술을 하러 가는 길에 그가 동행했다. 그런데 수술 10분 전 피해자가 "화장실을 간다"며 도망쳤다. 2시간 뒤 부천역에서 겨우 찾은 피해자는 "배에서 애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느냐. 애한테 빛보다 칼을 먼저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송씨는 "그 말을 듣고 함께 갔던 목사님과 나, 피해자 이렇게 셋이 길바닥에서 펑펑 울었다"며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초심을 잃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 '체인지메이커'에는 송씨 외에도 10 여명의 스태프가 함께 하고 있다. 정식으로 월급 받는 이는 한 명. 나머지는 활동비 정도만 받는다. 절반 이상이 소방관·요리사·학생 등 본업을 가진 비상근이다. 송씨는 "다들 힘들텐데도 단체톡방이 조용할 때가 없을 정도로 활기가 넘친다. 그저 이 일이 좋고 뜻이 맞아 뭉친 이들"이라고 말했다. 송씨는 "큰 목표는 없고 그저 활동을 계속 유지하는 게 목표"라며 "그렇게만 되면 향기 퍼지듯 우리를 믿고 손을 내밀고 또 손을 잡아주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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