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본 「전씨 은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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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침내 전두환씨는 갔다. 40여년 우리 헌정사 속에 깊고 어두운 상흔을 남겼던 그가 능멸과 오욕을 안은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5공 비리의 주역으로 낙인찍혀 TV앞에 선 전씨의 모습은 초라했다. 생기 잃은 눈동자, 푹 파인 이마의 주름살, 기어드는 듯한 목소리…. 그 어느 곳에서도 과거의 위압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씨는 역사의 교훈과 국민의 뜻을 거역한 정치군인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전씨의 서글픈 은둔은 뿌린 것만큼 거둔다는 응분의 교훈을 새삼 일깨워줬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난 것일까. 전씨의 「사과」와 「은둔」으로 5공이 남긴 그늘은 걷히고 상처는 아물어든 것인가.
전씨에 대한 「단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이를 시발로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 가리워진 비리의 실체를 규명해야한다.
우리는 너무 눈물이 흔했다. 독재자 이승만씨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던 날, 박정희의 운구 행렬이 동작동 국립묘지로 떠나던 날, 국민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독선과 아집으로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고 장기집권을 기도했던 독재자에게 국민은 냉정한 심판대신 값싼 동정의 눈물을 보냈고, 너무 쉽게 그들을 용서했다.
이 같은 국민적인 너그러움(?)이 전두환이란 또 한사람의 독재자를 낳게 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국민모두가 5공 비리의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닌가.
연희동 사저를 떠나는 전씨의 처연한 모습을 보며 연민은 느낄지라도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 진실을 규명키 위한 고삐를 늦춰서는 안된다.
그것은 저급한 보복이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도됐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요, 내팽개쳐졌던 위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다시 남비 끓듯 달아올랐다가 흐지부지 덮어주어야 하는가. 하릴없는 감상으로 정의를 파묻어 버리는 우를 범함 것인가. 은둔은 끝이 아니다. 마땅히 심판의 시작이어야 한다. <뉴욕에서 김용일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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